<소공녀>, 집이 없다는 것은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직업은 가사도우미인 미소. 아마도 미소에겐 비슷한 말들이 하루에도 몇번씩 던져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어?", "네 나이가 몇인데", "이제 안정적인 길 찾아야지" 같은. 나를 모르면서 나를 걱정하는 이들의 진심어린 눈빛을 보며 미소는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나는 정말 괜찮다는 걸 말하면 믿어줄지 또 한번 씁쓸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소공녀> 속 미소는 소유하기보다 존재하기를 선택하는 인물이다. 현대사회 소비 여정의 최종 목적지인 '집'. 대한민국 사회에서 집이 가지는 상징성과 권력은 어마어마하다. 날 때부터 부모가 집을 쥐어준 사람은 금수저, 전셋집에 살거나 건물 한 채도 없는 사람은 흙수저. 많은 이들의 꿈은 건물주 백수. 결혼이라는 계약에서 흔한 거래품으로 사용되는 것도 바로 아파트. 집의 상징성은 미소의 친구 중 한명인 대용의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이별한 아내의 흔적이 남아있는 아파트에서 너도 벗어나는 게 어떠냐는 미소의 말에, 대용은 울며 답한다. "이 집이 얼만 줄 알아? 이자를 한 달에 100만원씩 20년을 내야 해, 20년. 그런데 내 월급이 190만원이야." 잔뜩 울상짓는 대용의 모습에 객석 곳곳에서는 웃음이 터졌지만, 마냥 따라 웃을 수만은 없는 대목이었다. 조금, 아니 많이 무서워졌다. 나의 미래일까봐.
우리는 수능을 위해 12년을 달린다. 대학에 합격하면 등록금 몇 천만원을 들여 졸업을 위해 달린다. 졸업과 동시에 다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취업을 한다. 이제 열심히, 개미처럼 일할 차례다. 1인분의 몫을 다하기 위해서. 여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면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무시무시하게도 '내집 장만'이라는 보스몹이 남아있다. 누군가에겐 처음부터 주어지지만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야 하는, 혹은 그렇게 해서도 달성할 수 없는 목표. 이러한 공동의 목표를 거부한다는 것만으로도 미소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돌연변이' 같은 캐릭터다. 미소는 '집이 없는 것'과 '집이 없어도 괜찮은 것'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많은 영화에서 집없는 주인공을 보아왔어도, 집없어도 괜찮은 주인공을 본 적이 있는지? 캐리어와 몇 개의 가방만으로 압축되는 미소의 삶은 그야말로 미니멀리즘의 최고 단계다.
현대사회에서 소유와 존재는 종종 제로썸게임처럼 여겨진다. 패리스 힐튼은 내면이 텅 비었을 것 같고, 무소유를 주창한 법정스님의 내면은 풍성할 것이라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의 내면은 얕아질까? 개인적으로는 오래전 '그렇지 않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소유할수록 행복하다는 반대 명제를 옹호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저 별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이다. 한 달에 150만원을 쓸 때나 50만원을 쓸 때나 행복도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1500만원과 50만의 차이라면 달라질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 경험치 밖이니 어쩔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미소가 덜 소유함으로써 더 자유로워지기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것은 소유를 추구하며 왠지 모를 죄책감을 가졌던 과거의 나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적어도 지금의 내 생각으로는, 소유와 자유는 반비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소는 왜 소유를 포기한 것일까? 정신의 자유로움이라는 철학적 목표나 구도자적 자세가 아니라면 이렇게나 자본주의적 욕망을 멀리할 필요가 있을까? 이처럼 '왜'를 묻는 것은 <소공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질문이지만, 동시에 말이 안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미소는 소유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포기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샤넬백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인 '집' 또한 그렇다. 변변한 능력도, 경력도 없는 미소가 지금부터 열심히 일을 시작한다해도 집을 소유하기까지는 남은 평생을 바쳐야 할 테다.
괜찮은 아파트에 살고는 있지만, 그 공간에 붙어있기 위해 월급의 반을 바쳐야하는 대용. 나머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고있는 정미는 남편에게 꼼짝없이 잡혀사는 불행한 인물로 그려지고, 집이 있는 다른 친구들 모두 마찬가지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모인 이들은 미소를 언급하며 짐짓 연민을 던진다. 마치 집이 없는 미소가 가장 불쌍한 인물인 것처럼. 하지만 미소의 시선을 통해 그들의 삶을 조금씩 들여다본 우리는 알고 있다. 그중 누구도 딱히 미소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소유하는 게임에서 도태된 미소는 자신만의 안락한 세계를 만든다. 그 세계에는 집은 없지만, 위스키와 담배가 있다. 사랑스러운 남자친구 한솔이도 있다. 미소는 극중 인물 가운데 가장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다. 미소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소는 조금 더 잘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순간은 욕망에 충실한 때니깐. 100을 욕망하고 50을 충족시킨 사람과 10을 욕망하고 10을 충족시킨 사람. 누구로 살아갈지는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미소는 사랑스럽다. 낡은 옷 몇 벌을 돌려 입지만, 앞머리 절반이 새치로 덮였지만, 공중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지만, 미소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 당당함과 해맑음이야말로 미소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요인이다. 미소라는 인물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혹은 최소한 괜찮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하지만, 미소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어보았다. 미소처럼 살 수 있을까? 미소 같은 사람이 세상이 있을까? 대부분의 답변은 '아니, 불가능해'였다. 현실에서 연고도 없는 여성이 길바닥을 전전하며 일당 몇 만원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될까. 세상에는 위스키와 담배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불행과 위험이 넘쳐난다. 사실 미소는 한솔을 떠나보냄으로써 큰 행복 하나를 잃는다. 그 상실의 핵심에는 다시 '돈'이 있다. 두 사람이 같이 있으려면 집이 있어야 하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한다. 같이 있기 위해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 또 하나의 모순이다.
<소공녀>는 이처럼 이상(미소)과 현실(미소에게 닥친 상황)의 대비를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미소가 '위스키, 담배, 한솔'을 끝까지 붙잡으며 YOLO 라이프를 고수했다면 비현실적인 힙스터 아이콘으로 남았을 것이다. 반대로, 현실에 이기지 못해 세 가지 행복을 포기했더라면 영화는 우울하게 막을 내렸을 것이다. <소공녀>는 어느 한 쪽을 택하는 대신, 그저 가능성을 열어둔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한강에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미소의 모습을 멀리서 비춘다. 그런데, 비행기 착륙 소리가 오버랩된다. 한솔이가 돌아온 것일까? 그렇다고 믿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딱히 정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미소의 얼굴을 끝끝내 비추지 않는 카메라처럼. 전고운 감독은 <소공녀>를 시작한 것이 "나만 이래?"라는 질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미소의 결말이 확실한 행복이거나 불행이라면 관객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조언'을 던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마 미소는 외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불쌍하지 않아!"라고. 미소를 불쌍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곧 우리 스스로에 대한 공격일지도 모른다. 우리 중 누구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을 욕망하길 강요하는 자본주의와 결혼을 욕망하길 강요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미소처럼 살 수는 없어도 가끔 미소를 떠올릴 수는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미소를 동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