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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 Apr 27. 2020

몸과 평생 동거하기

태어나기 전에 고를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몸도 그 중 하나다. 몸에 투자하는 에너지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느끼고 있다. 꾸준한 영양제 섭취, 스트레칭과 필라테스, 건강검진 받기, 바른 자세로 앉기, 몸무게 재기, 피부 상태에 맞는 화장품을 고르고 바르는 일, 주기적으로 뿌리염색과 커트하기, 나의 몸을 가장 멋있게 표현해줄 옷과 악세서리를 찾아다니는 일, 뭘 입을지 아침마다 고민하기 등등. 이 중 많은 것들은 돈을 필요로 하기에, 월화수목금 회사에서 돈을 버는 일도 크게 보면 우리의 몸을 위한 일이다. 애초에 산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싸는 것의 반복이 아니던가.


어쩌면 나라는 인간의 구성에 있어 정신보다 몸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 관리를 아무리 탁월하게 하더라도 거울 속에서 나를 마주하는 것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인간 한 명의 형체일 뿐이다. 물론, 카일리 제너 같은 탈인간적 아름다움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위에 열거한 노력의 3배도 감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끔은 카일리 제너보다 스물일곱 해 동안 무척 친근해진 나의 눈코입 팔다리가 좋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의 신체는 지구인의 몸 평균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각자 가진 몸은 무척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고민들을 가지고 있다. 피부에 돈과 시간을 퍼붓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어떤 친구는 지병이 있어 식단을 엄격하게 관리하기도 한다. 이처럼 몸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골칫거리임이 분명하다. 어릴 때는 주변인들의 몸에서 장점만을 골라내어 내 몸에 적용한다면 그야말로 인생이 완벽해질 거라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지만, 여러 대화를 통해 몸의 고민은 아주 보편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비교를 멈추었다.


자신과 타인의 외모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던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와 친구들의 감정 그래프는 우쭐함과 수치심을 오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수많은 친구들이 성형수술을 했다. 3년 동안 억눌렸던 한을 폭발 시키듯 각자의 몸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다듬었다. 예뻐진다는 것은 좋은 일인데 왜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의 마음 한 켠이 답답하고 화가 났는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 '단체 성형 움직임'에는 어딘가 처절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영화 <헤드윅>의 주인공은 "나를 부정하면 파멸하리라(Deny me and be doomed)"고 경고했지만, 당시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나를 부정한 타인을 파멸시킬 능력 같은 건 없었다. 부정, 부정, 부정... 서로가 타고난 것들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찬 고등학교 시절은 어떤 면에서는 지옥이었다.


다행히도 대학에 입학하니 성숙한(또는 그런 척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외모에 대한 나와 친구들의 자의식도 줄어들었다. 입학생들 중 미남미녀를 찾아내는 놀이는 여전했지만 고등학교를 하드코어(?)로 겪은 나에겐 큰 감흥이 없었다. 거울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고 우쭐함과 부끄러움을 오가는 빈도가 느슨해지니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능력이 길러졌다. 타인을 볼 때 외모보다 매력을 중요하게 바라보는 건 그 자체로 무척 즐거웠다. 외모가 화려하고 재미가 없는 사람과 평범한 외모를 지녔지만 확실한 주관과 뛰어난 개그실력을 지닌 사람, 모두에게 쉽게 반하곤 했으나 시선이 훨씬 오래 머무르는 대상은 후자였다.


이렇게 몸이라는 족쇄에서 자유로워지는가 싶었더니, 이제 건강이 화두가 되기 시작했다. 스물세 살 쯤 찾아온 왼쪽 머리의 두통은 나에게 두개골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자각하게 만들었다. 고통의 강도는 약해서 조금 불편한 느낌이 전부였음에도 며칠 이상 지속되는 두통에 나는 혼비백산했다. 죽을 때까지 이러면 어쩌지 싶었다. (이것을 우리는 '호들갑'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런데, 몇 달 간 통증과 함께하다보니 그것에 무뎌지고 친숙해진 것은 물론 통증을 다루는 요령도 생겼다. 커피를 줄이고 수면시간을 늘리고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해 노력하는 익숙한 레파토리를 통해 두통을 조금씩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몸은 우리가 선택의 여지 없이 평생 동거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죽을 때까지 함께할 것이기에 우리는 각자의 몸과 최대한 잘 동거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룸메이트와 싸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두통을 대처했던 방법처럼, 상대방을 세심하게 파악하는 것이 최소한의 노력이다. 이건 꽤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알지만 모른 척 하는 경우도 있다. 소주 한 병을 넘기면 다음날 숙취가 생긴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구태여 모르는 척 하고 싶은 밤이 있듯이. 아무튼, 동거인에 대한 파악이 끝나면 그에 따라 생활 패턴을 맞춰야 한다. 나에게 적절한 수면시간이 7시간 이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렇게 몸과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동거의 양식을 맞춰나가는 건 평생에 걸쳐 필요한 작업이다.


나는 가족 아닌 사람과 같이 산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1년 간 거의 트러블이 없었지만 그나마 진지한 대화를 했던 두 번 정도는 집안일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바깥생활을 만족스러울 때까지 한 다음 후순위로 집안일을 처리했는데 룸메이트에게는 집안일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자연스레 설거지와 청소 같은 일은 그녀의 몫이 되었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언짢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건 괴로웠기 때문에 진지한 대화를 하고나면 집안일에 신경을 썼다. 이 패턴은 술이나 밤새기로 스스로의 몸을 괴롭힌 다음 몸이 보내는 언짢은 신호를 느끼고서야 외양간을 고치는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동거인 혹은 몸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트러블을 줄여나갈 것이다. 이처럼 몸을 동거인으로 인식하니 원인과 결과를 좀 더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됐다.


미래사회를 그린 BBC 드라마 <이어스 앤 이어스>에는 '트랜스휴먼(Transhuman)'이 되고 싶어하는 10대 소녀가 등장한다. 트랜스휴먼이란 인간의 영혼을 디지털화한 결과물로, 인류가 최초로 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개념이다. 아침마다 긴 머리를 감고 말리는 과정이 귀찮게 느껴질 때면 트랜스휴먼에 대한 유혹이 고개를 들곤 하지만, 막상 그러한 기술이 보편화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디지털화할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때때로 짐처럼 느껴지는 몸이지만, 감각을 저장하고 세월을 반영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도록 하는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몸이 있다는 것은 까다롭고 섬세한 유기체와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삶의 본질 중 일부는 그 대화 속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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