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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양병원 입원 전후 엄마의 심리 변화

친정엄마의 요양병원이야기 (2018년에 돌아가심)

by 데레사


엄마는 팔순 기념 제주도 여행을 다녀올 만큼 건강했고,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평소에는 논밭을 다니며 여전히 농사일을 하셨고, 예전보다 오히려 더 잘 먹어서 체중도 조금 증가했고 아주 건강해 보였다. 다만 평소에 늘 낮에 졸린다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지는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시골의 부모를 돌 볼 때 놓친 게 있었다. 국가에서 하는 정기 종합검사를 제대로 받았는지 점검을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만일 뇌 CT라도 찍어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쓰러진 후, 이미 남해, 진주 두 곳의 응급실을 거쳐서, 창원의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지만 치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곳에서 일주일 정도를 있었을까?


수술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고, 약물과 링거를 통해 치료했다. 마비가 된 몸은 물리치료를 통해 조금씩 풀어주어야 해서, 부산의 뇌경색 전문병원으로 또 이송을 했다. 엄마는 갑차기 쓰러지고 편마비가 온 현실과 병원을 자꾸 옮기는 과정에서 상당히 불안해 했다. 왜 몸이 이렇게 되었는지 곰곰이 따져보기도 하고, 자신이 살면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책하기도 했다.



대학병원 응급실, 중환자실을 거쳐 뇌경색 전문병원에 입원


부산에서 뇌경색으로 유명하다는 병원에 입원 후, 24시간 개인 간병사를 고용해서 엄마를 돌보게 했다. 그 병원은 전문적인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병행했기 때문이다. 간병사 비용이 월 200만 원이 넘었지만 최대한 초기에 집중적으로 치료를 하면 마비된 몸이 조금 풀릴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다.



우리가 육 남매지만 모두가 일을 하고 있었고, 부산에 사는 사람은 없었기에 엄마를 옆에서 간병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돌아가면서, 또는 시간이 맞으면 함께 모여 엄마에게 자주 갔다.

간호사와 간병사의 말을 통해, 엄마가 물리치료를 아주 적극적으로 하고, 재활의지가 강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평소 엄마 성격으로 봐서 아마도 이겨보려고 온 힘을 다해 왼쪽 다리를 움직이고, 왼쪽 팔에 힘을 주었을 것 같았다.


갈 때마다 발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는지, 실낱같은 희망을 보려고 애썼다. 한 번은 엄마를 일으켜 세워서 조금이라도 왼쪽 발을 움직여 보게 하려고 두 발을 바닥에 딛게 했다. 물론 양쪽에서 부축한 채로.

“엄마, 왼쪽 발을 조금만 움직여 봐.”


우리의 요구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왼쪽 발이 잠깐 움직였다. 아마도 자로 재었다면 3cm나 움직였을까? 우리는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환호를 질렀다. 엄마도 입가에 슬쩍 미소가 스쳤다. 그 미세한 움직임에 우리도 뭔가 물리치료를 하면 나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잠시 부풀어 올랐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움직였다기보다는 어떤 반동 차원의 움직임이었던 같았다. 그 이후로 왼쪽 몸은 어떤 움직임도 없었으니까.


병원의 물리치료실은 여러 가지 기구와 한방 치료를 겸해서 오전, 오후 치료를 했다. 물리치료사들은 약간은 기계적으로, 한편으로는 애정을 담아 엄마 몸을 정성스럽게 풀어주려고 애썼다.


기계와 치료기 등을 통해, 또는 맨손으로 누르고, 주무르고, 돌리기를 해 주었다. 그럼에도 한 달이 지나도록 엄마 몸의 왼쪽은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병원에서 하는 건, 약과 물리치료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좀 더 큰 병원은 뭔가 다른 치료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엄마의 진단서를 들고 몇 군데 병원에 가 봐도, 달리 치료방법이 없었다. 돌아오는 답은 자녀들이 돌 볼 수 있는 가까운 요양병원에서 물리치료하며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였다.


결국 요양병원으로 옮기기로 하고, 엄마를 가까이서 돌볼 수 없는 부산보다는 우리 형제들이 사는 곳에서 시설이 나은 곳을 찾아봤다. 육 남매는 경기도, 전주, 대구, 밀양, 창원, 남해에 흩어져 산다. 남동생과 내가 이리저리 알아보면서 남해는 오빠가 살뜰하게 엄마를 돌 볼 것 같지는 않고 시설도 내키지 않았다.


남해와 멀지 않으면서 쾌적하고, 물리치료 시설이 잘 된 곳 중, 여러 곳을 직접 가보고 상담을 하면서 내가 사는 창원의 요양병원을 선택했다. 우리 집과도 가까운 거리였고, 시설과 비용을 감안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엄마의 심리 변화: 원인 찾기 자책 》 슬픔 》 비현실감


처음에는 갑자기 쓰러져 거동을 못하게 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문병 온 자식이나 친척들을 보면서 자주 울었다. 그 이후에는 한탄으로 변했다.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현실을 조금씩 인식하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식사도 잘하셨다. 그런데 표정은 슬픔으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소리는 내지 않고 입은 웃고 있었다. 그것도 활짝 웃는 입모습이었다. 그 괴상한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감정표출을 숨기다 보니 그렇게 밸런스가 맞지 않는 감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분노가 오는 것 같았다.


옆 침상 할머니들과 사소한 언쟁도 있었다. 자식들이 자주 들락거리면 고생하는데 뭣하러 왔느냐며 목소리도 제법 뚜렷하게 말씀하셨다. 처음 몇 달간은 의지를 내어서 물리치료도 열심히 받았다. 그 이후에는 식사를 제대로 못하면서 살은 빠지고, 의식도 거의 체념으로 변해갔다. 심신이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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