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최초의 '신발' 우체통, feat. 대항해시대의 로맨틱 가이
남아공 남해안 '가든루트'중 하나인 모셀베이에는 이 나라 최초의 (신발 모양의) 우체통이 있다. 만화에서처럼 페드로 다타이데(Pedro d'Ataide)가 모셀베이에 뜻하지 않게 정박하게 된 이후 자신의 신발에 편지를 남기고 가면서 시작되었다. 만화와는 다르게 행운의 편지는 아니었고, 자신이 어쩌다가 이렇게 모셀베이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인도 캘리컷(Calicut) 지방을 목적지로 향할지도 모르는 후배 항행가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와 카브랄은 캘리컷의 통치자인 Zamorin(직책의 이름)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막 쫓겨 나온 참이었기 때문이다. 편지에 아래와 같이 적혀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인도 캘리컷에서 아랍 폭도들이 우리의 건물을 불태우고 부쉈다. 우리의 돈을 받고 우리를 보호해겠노라 약속했던 캘리컷의 Zamorin으로부터 보호를 받기는 커녕 위협을 받으며 쫓겨났다. 캘리컷은 우리 인도 항로의 최종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화에서 카브랄이 다타이데를 버리고 간 것처럼 묘사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캘리컷에서 쫓겨 나올 때 다타이데에게 무겁고 느린 배를 배정한 사람이 카브랄이었다는 점. 그 느린 배를 배려하지 않고 항로를 정하여 다타이데가 낙오하게된 정황을 보아 둘이 서로 껄끄러운 사이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 것이다. 어찌 됐든 다타이데는 세네갈 해안에서 카브랄과 다시 만나 함께 복귀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한다.
다타이데가 모셀베이에 남기고 갔던 편지는 그후 인도 항로 개척 제3차 함대(armada) 소속의 주앙 다 노바(João da Nova)에 의해 발견되었다. 다타이데의 편지에 감명을 받은 것일까? 주앙 다 노바 역시 후속 함대에게 남기고픈 말을 다타이데의 신발에 남기고 떠났다. 이렇게 최초의 우체통이 탄생하게 되었다. 인도까지 가는 기나긴 여정에서 모셀베이는 신선한 물과 야채 등의 식량 확보에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후속 함대는 계속 모셀베이에 들어왔고, 편지가 계속 이어져갔다.
남아공 첫 우체통으로 기록된 다타이데의 신발. 지금은 모셀베이 디아스 박물관에 모형으로 남아 있다. 단순히 모형으로서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체통으로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이 신발 우체통으로 접수된 편지는 공짜로 배달된다고 한다. (국제 우편은 안 될 것 같다.) 굉장히 센스 있게 관리하고 있어 놀라웠다.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이 한 꺼풀 더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번외로 다타이데가 남긴 편지는 모셀베이 이외에도 더 있었다. 모셀베이의 편지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제4차 함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그는 모잠비크에서 조난되고 편지를 남겼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가 버린 동료에 대한 원망을 왕에게 남기고 다타이데는 모잠비크에서 눈을 감았다. 이 편지 또한 제6차 함대에 의해 발견되어 유명해졌다. 이렇게 보니 다타이데 라는 사람은 편지 쓰기를 좋아하는 로맨틱한 사람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대항해시대라는 역사 속에서의 활약상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지라도 신발에 편지를 남긴 그의 낭만은 여전히 모셀베이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