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김해서, 2022)
마음이 복잡해질 때마다 동네 도서관에 간다. 내가 엄청난 독서광이라, 하루에 한 글자라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도서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침묵 속 고요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이 좋다. 느지막이 일어나 오후 3~4시쯤 집에서 나와 약 20분 거리에 위치한 동네 도서관에 가는 길이면 근처 중, 고등학교의 하교시간과 맞물려 횡단보도와 버스정류장에는 교복을 입은 친구들로 바글바글하다.
음량은 최대로, 귀에는 헤드셋을 낀 상태이지만 이들 옆을 지나칠 때면 그들이 내뿜는 열기가 헤드셋을 뚫고 내게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만 같다.
한 번의 사거리, 두 번의 횡단보도를 건너 도착한 도서관에서는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이 있는지 살펴보는 척 주변을 힐끔거린다. 창가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시는 지긋한 어르신부터, 여러 서적을 잔뜩 쌓아두고 필기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까지.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이곳에 오면, 나도 이들의 일원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근 두 달간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현 상태에 대한 무기력함과 최근 잦은 빈도로 얼굴을 들이대곤 하는 노잼 시기가 겹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힘이 쭉쭉 빠졌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가'라는 문장에 여러 개의 물음표가 붙은 뒤로는 그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
오전을 통으로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기만 하다 흘려보낸 것 같을 때, 내 모든 감정이 밑바닥으로 처박혀 도무지 뽑히지 않을 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몸짓을 불려 나를 삼켜올 때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한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끌고 와도 괜찮다. 첫 문장이 관건이다. 다음은 의외로 쉽게,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풀릴 수도 있다. 일단 손들고 일어나면 말을 좀 더듬더라도 무슨 얘기든 하게 되는 것처럼. 시만큼이나 산문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잘 살고 싶을 때 산문을 쓴다. 나를 한번 믿어보고 싶을 때.
(나는 잘 살고 싶을 때 산문을 쓴다, p.44)
이 구절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게 있어 '첫 문장'은 도서관에 가기 위해 신발을 구겨 신고 내딛는 첫 발걸음이 아닐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도서관에 가는 길, 머릿속에서 베베 꼬이다 못해 잔뜩 엉켜버린 생각 뭉텅이들을 하나씩 꺼내어본다.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면 더 난잡하게 뒤섞여버렸을 감정들. 나는 그런 감정들에 쉽게 속아버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환기시켜야 한다.
그냥 줄을 길게 늘여보는 거다. 마음 어딘가에 꼬여 있는 실타래의 끝을 잡아 당기다 보면 훌훌 풀어진다. 시든 산문이든, 난데없이 첫 문장 띄워 올리는 걸 잘하는 사람. ‘쓰는 감각’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매일 그 시작을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 훌훌 문장 안에서 내려앉고 날기를 반복하는 나비가 된다.
(나는 잘 살고 싶을 때 산문을 쓴다, p.45)
저자 김해서가 잘 살고 싶을 때마다 산문을 쓰듯이, 나는 잘 살고 싶어질 때마다 도서관에 갈 채비를 한다.
때로는 반납할 책을 바리바리 싸 든 채로, 어느 날은 감지 않은 머리를 행여 들킬세라 모자를 깊숙이 푹 눌러쓰고는 오른발을, 그다음에는 왼발을, 다시 오른발 순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나라는 존재의 쓸모가 자꾸 흐릿해질 때면 나는 도서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때 우리를 울렸던 고민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로 울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내면의 불안과 투쟁해야만 한 사람의 고유한 서사가 만들어진다는 걸 이젠 알고, “심심한 마음으로 환영한다. 다 받아들임.”하고 말할 수 있다.
(자기만의 바닥, p.38)
나는 언제쯤이면 저자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마음들 앞에서도 "심심한 마음으로 환영한다. 다 받아들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미래의 나에게 몇 가지 물음이 담긴 편지를 띄워본다.
어쩌면 지금은 이 물음에 답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장의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여느 때처럼 씩씩하게 일어나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다 보면,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내가 나에게 보낸 편지 속 물음의 답장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오늘도 신발을 잔뜩 구겨 신은 채로 문 앞을 나선다. 이 책과 함께라면 언제고 다시 일어나 그곳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