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모르그 디오라마> (박민정, 2018)
관찰 예능이 대세다. 혼자 사는 스타의 일상을 패널들과 함께 지켜보는 프로그램부터 연예인 아버지와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프로그램까지 그 모습도 참 다양하다. 물론 카메라 속 스타들의 모습이 온전한 ‘진짜’는 아니다. 제작진들로부터 일부분 연출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관찰 예능이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비밀스럽게 여겨지던 스타의 사생활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은 아닐까. 이처럼 관찰 예능은 일종의 리얼리티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리얼리티를 표방하던 한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대본이 있다는 사실은 한동안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에 있어 프로그램의 틀을 구성하는 대본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진짜라고 믿던 모습이 연출된 가짜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진짜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실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프로그램은 폐지 수순을 밟았다.
우리는 진짜에 열광한다. 소설은 19세기 말 파리의 모르그 시체 공시소를 언급하며 과거부터 이어져온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원 미상의 시체를 전시하여 시체의 가족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이곳(모르그 시체 공시소)은 좀 더 생생한 진짜를 보고 싶어 하는 파리 사람들의 구경 명소로 전락하게 되었다. 과연 당시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을까?
시체를 구경하는 것만이 유일한 스펙터클이었던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은 100년이 지난 현대사회에서 몰래카메라(이하 몰카)를 소비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눈들은 앞서 이야기한 모르그 시체 공시소에서부터 현대사회에 만연한 몰카까지, 그리고 이내 소설 속 ‘나’가 겪은 성범죄로 귀결된다.
사진은 영혼을 앗아간다던 옛 미신이 다른 의미로 현실이 되어버린 현 사회에서 시선 폭력은 몰카라는 기술 매체의 시선으로 변모했다. (발가벗겨진 채) 사진이 찍혔던 그 날을 화자는 임사체험으로 자신의 기억을 가공한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다. ‘나’가 성범죄를 당했던 기억을 임사체험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때의 나를 살해해야지만 그녀가 이후의 삶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건 이후 피해자들은 온전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그들에게 이후의 삶은 조각나버린 파편화된 세상이다. 그 파편들을 제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 번 깨져버린 세계는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지만, 해명할 수 있어야만 피해자들은 이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소설은 ‘나’가 당했던 성범죄를 고백하면서 끝을 맺는다.
“나는 죽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 그때 죽었어요.”
‘나’는 임사체험으로 봉인해 두었던 나의 진짜 기억과 마주한다. 소설은 화자가 내내 괄호 속(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의 진짜 기억을 찾기 위해 달려왔음을 드러낸다. 소설 내내 주인공의 임사체험으로만 알고 있던 사건의 진실이 드러남으로써 독자는 이전에 소설 속에서 ‘나’가 종말을 설레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소설 속에서의 종말은 이미 죽음이 된 현실이었다. 종말을 ‘두렵지만 설레는 것’이라고 말하던 화자의 마음도 이와 같은 맥락은 아니었을까. 그 사건 이후 자신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종말을 맞이한 세계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사진이 유포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 자신이 다니던 회사 포털에 몰카로 추정되는 음란 동영상들이 게시되고, 그 이후 그녀가 포털 사이트에 ‘일반인’, ‘서울’, ‘길거리’ 등을 검색한 이유는 자신도 어딘가에 전시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을지.
우리 사회의 몰카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순간 ‘찍는 순간 죽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몰카는 피해자에게 상징적인 죽음이다. 실제로 소설과 같이 포털사이트에 이와 같은 단어를 검색하면 몰카로 추정되는 여성들의 사진들이 나온다. (물론 몰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회 역사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이 몰카에 있어 피해자이었던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누구 하나 성범죄 피해자 아닌 사람 있을까?라고 덤덤히 말하던 동기의 이 질문이 씁쓸하게 들리는 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 문제가 더욱 걱정되는 건, 몰카가 일상 속에서 으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인식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리벤지 포르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보복성 포르노나 음란 사이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위 ‘여자 친구와의 관계 영상’이라 불리는 음란 동영상들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는, ‘진짜’에 열광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도 진짜잖아요... 사촌 형이 국산 아니면 볼 필요가 없대요. 전부 가짜라고...”
소설 속에서 음란 동영상을 최초로 유포한 사람은 놀랍게도 중학생 소년이었다.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러한 소년의 생각은 대개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학습된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소비하는 것쯤이야 별 거 아니라는 생각. 생각에 그럴듯한 변명이 붙으면서 그것은 어느 순간 사실로 둔갑하여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앞선 영상들을 소비하게 만든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를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그만큼 몰카의 방식도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관찰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관찰의 대상이다. 몰카의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정보통신의 발달로 우리의 정보는 쉴 새 없이 기록되고 수집되고 있다. 실시간으로 감시되고 기록되는 현 우리 사회는 투명한 열린 감옥과도 같다. 일상 속에 숨어있는 수상한 눈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사이트에서는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끊임없이 업로드되고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몰카가 이에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묻고 싶다. 과연 우리의 존재가 ‘대상화’된 신체의 일부로만 인식된다는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소설 말미에서 화자는 자신의 진짜 기억과 대면하긴 했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괴로워할 것이고, 자신의 사진이 유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릴 것이다.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물 수는 있지만, 상처를 받은 기억조차 없던 일이 될 순 없는 법이니까.
지난 2018년, 대전시 교육청이 홈페이지에 게시한 성폭력 예방교육자료가 화제가 되었다. 웹툰 형식으로 제작된 이 만화에는 학생들의 몰카 불법 촬영, 공유, 성희롱, 성매매를 연상시키는 모습들이 필터링 없이 드러나 있었다. 학생들을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교육청이 모방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자료를 학생들에게 배포한 셈이다. 아직도 사회는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데에 있어 섬세하지 못하다. 진짜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성범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어루만질 제도적 측면이 취약한 오늘날 사회는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