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나만의 속도로
어느 날 피드에 뜨개질 영상 하나가 뜨더니 이내 내 피드를 점령해 버렸다. 나만의 백화점, 다 있는 상점에서 저렴한 가격에 털실과 코바늘을 구매하고 몇 번 뜨다 보니 재미가 들렸다.
요즘은 퇴근하고 뜨개 영상만 찾아본다. 내가 할 수 있을 법한 작품이 보이면 영상 속도를 0.5배속으로 늦추고 천천히 따라 한다. 하나, 둘... 맞닿은 실 안으로 바늘을 넣었다가 빼본다. 쉽지는 않지만 꽤 즐겁다.
뜨개와는 달리 내 일상은 빠르게 돌아간다. "바쁜데 거기 서 있지 말고 좀 비켜." 어린 시절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처음 들었던 말. 바쁘면 그냥 서 있는 것도 잘못이 된다. 나는 잘못하기 싫어서 '빨리빨리'를 읊조리며 자랐다.
머리가 조금 더 굵어진 다음에는, 그게 무엇이든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살았다. 그래서 어딜 가나 나의 쓸모를 인정받고 싶었다. 나 벌써 이만큼 했어요. 나 잘했죠? 일종의 강박이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시간에 쫓기는 토끼가 된 것만 같았다. 자주 숨이 찼다.
그렇게 종종거리며 일해도 내가 미처 해내지 못하는 일이 생기던 무렵, 나는 시간을 들여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걸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가늠해 보게 됐다. 그리고 이내 포기.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날이 많아졌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매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뜨개질로 도망쳤다. 뜨개만은 내가 떠온 시간을 선명하게 보여주니까.
얼마 전에는 뜨개실로 이어폰 줄감개를 만들었다. 줄감개다 보니까 단추 구멍을 남겨두고 실을 떠야 하는 지점이 생겼다. 내가 실수로 코를 빼먹은 적은 있어도 일부러 코를 빼고 뜨개질을 하다니!
그래, 촘촘하게만 뜨는 건 재미없지. 단추 구멍으로 남겨둔 자리에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집어넣어 본다. 이 자리는 나중에 단추로 꽉 채워질 거다. 이 단추 구멍이 뭐라고 애틋해진다.
멈춰서 그동안 뜬 실을 만져본다. 보드랍다. 서로 얽히고설킨 실들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낸 감촉은 한 줄의 실보다 더 단단하고 힘이 있다. 나는 그게 좋아서 뜨개를 하다 말고 손끝으로 내가 뜬 실을 연신 쓰다듬는다. 그 덕에 내 뜨개의 진도는 보통사람들 보다 조금 느리다.
요령을 부리지 않아도, 부러 애쓰지 않아도 뜨개질은 내가 들인 시간만큼의 결과물로 나를 반긴다. 나에게 뜨개가 알려준 건 그런 것들이다.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그 시간조차 단추 구멍처럼 꼭 맞게 채워질 거라고, 그러니 느려도 정직하게 쌓아가는 기쁨을 만끽해도 좋다고.
뜨개질처럼 나의 일상도 최선을 다해 떠 나가야지. 새해에는 나만의 속도로, 한 코 한 코 떠 나가는 인생은 어떤 모양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