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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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갈까?
매일 아침, 사랑했던 사람을 잊고 다시 처음처럼 만나는 하루. 여자 주인공 마오리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친구와의 내기에 떠밀려 고백하게 된 남자 주인공 도루는 마오리에게 ‘날 진심으로 사랑하지 말 것’이라는 다소 황당한 연애의 조건을 듣는다. 마오리의 병이 밝혀지는 중반부에 가서야 관객들은 마오리가 내건 조건이 매일 지워지는 기억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는 걸 짐작하게 된다.
극은 마오리와 도루를 중심으로 이어지지만, 극 속에는 마오리 외에도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소설가를 꿈꾸면서도 응모조차 하지 않은 원고를 서랍 깊숙이 숨겨 둔 도루의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집을 떠난 도루의 누나, 그리고 마오리의 일기장 속 도루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이즈미와 겐토까지.
이들은 모두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거나, 누군가의 부재를 마주하기 두려워하는 인물들이다. 이즈미와 겐토 역시 ‘마오리’를 위한다고 했지만, 증세가 호전 중인 마오리에게 도루의 부재를 알린 후 마주할 그녀의 슬픔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러나 극의 후반부에서 인물들은 결국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 전환점을 이끄는 인물은 다름 아닌 마오리다.
증세가 호전되며, 마오리는 자신의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지만 흔적은 사라진 도루의 존재를 끈질기게 좇는다. 그녀의 변화를 바라보며 친구들도 결국 도루의 존재를 마오리에게 알리고, 마오리는 도루의 사진 앞에서 자신을 ‘행복한 오늘’로 만들어 주었던 그를 떠올리며 극은 마무리된다.
영원할 것 같던 관계도 언젠가는 옅어진다. 예전엔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가오는 인연에게도 '어차피 시절인연일 테니까'라며 온 마음을 내어 주지도 못했다.
일종의 회의감이자 치기 어린 반항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추억의 선명도보다는 지나온 과거가 모여 현재의 내가 되었다는 걸. 지금 함께하는 순간들이 언젠가 옅어질지라도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의 나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기에. 그러니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안에 남은 사랑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극 중 인물들이 외치던 "오늘은 오늘만 오늘이니까."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기억은 흐릿해지고, 관계는 옅어지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던 '오늘'은 우리의 마음 어딘가에 남아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리고 그걸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늘이라는 시간을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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