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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REview

제프 맥페트리지가 그리는 단단한 일상

영화,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

by 모래


애플워치 유저들에게 친숙한 이 얼굴 그림, 영화 <Her> 속 사만다의 인터페이스, 나이키와 에르메스 등 여러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우리에게 어딘가 익숙한 그림체를 따라가다 보면, ‘제프 맥페트리지’라는 인물이 나온다.



영화 <제프 맥페트리지>는 일명 성공한 예술가의 단편적 일상이 아닌 그의 창작 과정을 좇으면서 그의 삶 전반에 녹아 있는 신념을 5장에 걸쳐 보여준다.


제프 맥페트리지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예술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술과 마약, 여자에 몰두하며 영감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는 예술가의 모습 대신, 그는 단정하고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작업에 몰두한다. 정돈된 공간과 일정한 루틴,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하는 그의 방식. 특히 외부의 기대나 제안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리듬을 지키기 위해 확실히 거절할 줄 아는 태도는 특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는 본인의 삶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최우선에 둔다. 그렇기에 그의 삶 속에서 작품은 그를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통해 지속 가능한 창작 환경을 만들고,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는다. 매일 달리기를 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예술을 즐긴다.


그의 삶을 보며, 나 역시 글을 처음 쓰게 된 시기를 떠올리게 된다. 시작의 이유는 분명 ‘즐거움’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결과와 수치에 매몰되어 괴로워하던 기억. 나는 늘 현생의 나를 갈아서 무언가 만들어 내고자 했다. 그렇게 창작은 나의 삶을 갉아먹고, 일상마저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수치나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 시간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 안에 보이지 않는 내가 들인 노력과 집중, 수많은 실패와 회복이 쌓여야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은 금세 잊힌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의도적으로 환기시켜야 한다. 제프 맥페트리지의 창작과 삶을 들여다보면서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을 다시금 떠올린다.



영화 속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뽑자면, 단연 그가 실패를 대하는 태도였다. 오랜 시간 작업을 해오며 모든 결과물이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을 터. 하지만 그는 실패 앞에서도 결코 단념하지 않는다. 오히려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실패조차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태도에는 단단함이 있다. 끝까지 작업을 밀고 나가는 힘, 미완성이나 미흡함을 덮어두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 그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의지. 모든 시도가 반드시 어떤 성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에너지, 고민의 가치를 인정하는 자세가 녹아져 있다.


나 역시 이따금 과거의 작업물들을 꺼내어 본다. 작업한 시간에 비하면 속도가 더딘 탓에 절대적인 양이 많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모아보니 양이 제법 된다. 그 말인즉슨 세상에 내보이지 못한 작품 역시 그만큼 쌓였다는 거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지 못해, 어쩌면 평생을 내 컴퓨터 안에서 빛을 보지 못할 글들. 한때 나에게 그 모든 글은 전부 실패로 느껴졌다.


하지만 제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의 나는 결과에 있어 지나치게 조급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대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담담하게 말을 내뱉던 그의 모습이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던 건 아마도 그게 내가 오랫동안 배우고 싶었던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고 어디로 향하는지 생각해요.


제프의 이 말에는 타인의 기대나 외부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의하며 그 방향을 주도적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의 의지는 영화를 관람하는 또 다른 창작자들에게도 단단한 중심축이 된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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