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say

올해는 대충 살아보겠습니다

아무 노트에다 끄적여보는 새해 다짐

by 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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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노트북 앞에서 멍때리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지금도 메모장을 켜고 여기까지 타이핑을 치는데 정확히 1시간 3분이 걸렸다. 이처럼 시간을 정확히 세어볼 수 있는 건, 내가 카페에 들어와 음료를 주문한 시간이 영수증 위에 떡하니 적혀 있기 때문이다. 63분이라는 시간 동안 노트북 화면 속 커서는 가만히 앉아 있는 나보다도 성실하게 깜빡였고, 그 앞에서 정작 나는 핸드폰으로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나 자신을 대상으로 수차례 임상 시험을 거친 결과, 지금 이 현상은 '잘 쓰고 싶다'라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새해가 하루 지난 연초,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기에 이만한 명분도 없다. 다짐, 계획, 목표 같은 단어의 힘이 가장 세고 무거운 시기다. 하지만 이때 세운 결심이 연말까지 살아남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그래서일까. 새해가 되면 유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괜히 온몸에 막 힘이 들어간다. 새로 장만한 새하얀 다이어리 첫 장에 실수로 글자를 틀리는 순간, 그해의 다이어리의 수명은 끝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망할 순 없다. 나는 실수하지 않으려 새 다이어리를 펼칠 때마다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집중력을 동원해 글씨를 써 내려갔다.


새 다이어리, 새 공책에 혹시라도 오타가 날까 봐 이면지에 미리 써보기도 한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가장 반듯한 모양으로 오와 열을 맞추듯 쓴다. 문제는 이렇게 쓰다 보면 쉽게 지친다는 거다. 그렇게 열과 성을 들여 써 내려간 다이어리 가운데 내가 끝까지 사용한 다이어리는 한 개도 없었다. 책장을 들여다보면 새것 같은 다이어리들이 대부분 1월 초에 적힌 단정한 다짐과 함께 그 시간에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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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예쁜 필기구를 써야 글쓰기에 애착이 생긴다고 했다. 정말 그런가? 무작정 따라 해 봤지만, 내겐 오히려 정반대였다. 인생에서 모두에게 같은 방법이 먹히는 건 아니었다. 나의 경우 필기구가 예쁘면 예쁠수록 소중히 다루고 싶어졌다. 나의 실수로 이 완벽한 필기구에 흠집을 내기 싫은 마음이랄까. 그렇게 초반에만 열심히 쓰다가 이내 시들. 힘 빠진 글씨는 완벽해야 할 나의 다이어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학생 때는 새로 장만한 반질반질한 노트보다, 학교 앞에서 공짜로 나눠주던 미술학원 홍보용 흰색 무지 노트를 애용했다. 사회에 나온 뒤에는 회사에서 연초에 주는 못생긴 업무 노트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빼곡한 기록을 남긴 공책이 됐다. 괴발개발, 삐뚤어진 글씨에 온갖 포스트잇과 형광펜이 덕지덕지 묻어있고 귀퉁이가 자주 접혀 너덜거리긴 해도 그만큼 손이 잘 가는 노트가 없었다.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나를 억지로 책상 앞에 앉혀 두긴 했지만, 노트를 펼쳐 무언가를 쓰게 하지는 못했다. 커서를 앞에 두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작은 실수와 얼룩 한 점에도 완전한 실패를 선언하며 뒷걸음질 치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노트를 채우는 기깔나는 글씨가 아니라 대충이라도 써보자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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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늘 내가 이 글을 시작하는 데에도 1시간 3분이나 걸린 까닭은 내가 여전히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던 탓일 거다. 완벽한 첫 문장이 아니면 이 글 전체는 망해 버리고 말 거라는 불안함으로 자판 위에서 머뭇거리기를 반복했다. 오늘의 나는 1시간 3분이 지나서야 잘 쓰고 싶다는 마음과 타협했다.


아무거나 대충 쓸 테다! 머리로 이 말을 수없이 되뇌며 써 내려가다 보니, 잘 쓰진 못해도 어떻게든 글의 구색이 갖춰지긴 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나는 예년과는 조금 다른 목표를 세워본다. 올해는 대충 살아보겠다는 목표. 손에 잡히는 아무 노트에 대충 끄적여본 문장처럼 무엇이 되었든 대충 시작해 보자고.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 보겠다는 다짐을 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구색을 갖춘 나만의 글이 내 눈앞에 쌓여 있지 않을까?


'올해는 대충 살아보겠습니다.' 이 말 한 마디로 여느 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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