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의 거친 웅장함과 샤토 통가리로 호텔의 클래식한 품격을 체험하다
통가리로 국립공원에서 눈을 밟다
뉴질랜드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데 그래도 '눈은 한 번 봐야지' 하는 마음에 통가리로 국립공원에서 1박 2일을 보내기로 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통가리로 국립공원은 1894년 뉴질랜드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타우포 Taupo 화산대에 있다. 루아페후 산 MT. Ruapehu (2,797 m), 나우루호에 산 MT. Ngauruhoe, 통가리로 산 MT. Tongariro을 포함한 국립공원은 1990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마오리의 성지인 국립공원의 문화적 가치를 평가받아 1993년 문화유산 등록 기준이 추가적으로 적용된 복합 유산이다. 아라타키 해변 근처의 에어비엔비에서 아침 일찍 짐을 싸서 출발했다. 3시간 반 정도를 달려 도착한 통가리로 국립공원. 저 멀리 하얀 고깔모자를 쓴 듯한 눈 덮인 산의 웅장한 자태가 눈앞에 펼쳐질 때 (가보지는 않았지만 살짝 후지산 그림 액자 느낌과 비슷한 그런 느낌) 우와~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확실히 다른 지역 대비 기온이 낮은 편이라 그런지 (그러니 눈이 녹지 않고 남아있겠지만) 롱패딩과 장갑으로 무장했음에도 강한 바람이 불어 오랜만에 차가운 겨울 공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루아페후 산의 와카파파 Whakapapa 스키리조트에 주차를 한 뒤 산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초보자용 스키/스노보드 슬로프와 눈썰매 슬로프에는 인공눈을 계속 뿌리고 있었다. 예전에 스노보드를 타다 손목 인대가 늘어났던 경험이 있어 겨울 스포츠를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간단히 트랙킹을 하기로 했다. 트레일에는 눈이 거의 없고 폭신한 정체모를 잡초와 화산 바위로 덮여있었다. 화산은 처음 봐서 그런지 눈앞에 펼쳐진 Earth룩의 색감, 특히 다양한 베리에이션의 그레이와 브라운톤이 신기하면서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간혹 하얀 눈이 보일 때면 억지로 다가가 내 발자국을 남겨보았다. 여기 왔었다는 나만의 흔적. 시간이 지나 눈이 녹거나 눈에 덮이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내 흔적을 말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배도 고파 트레일 초입에서 트랙킹을 멈춰야 했지만 (뉴질랜드에서는 자연을 거스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웅장한 루아페후 화산의 거친 바위를 보며 2012년까지 활동한 화산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바위 절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암벽등반용 볼트가 곳곳에 박혀있었다. 한 때 암벽등반을 즐기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렇게 깎아지른 직벽을 등반하려면 굉장한 체력과 스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인 샤토 통가리로 호텔 Chauteau Tongariro Hotel에서 시니어 피아니스트로 밤을 물들다
산에서 내려와 점심도 먹고 체크인도 하기 위해 샤토 통가리로 호텔로 향했다. 1929년에 세워진 이 호텔은 루아페후 산의 설경을 배경 삼아 파스텔톤이 우아한 유럽의 저택처럼 보였다. 오후 3시부터 체크인이라 라운지에서 기다리는데 실제 나무로 불을 때는 벽난로 근처에 놓인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자니 노곤노곤 졸음이 몰려왔다. 대부분의 호텔 숙박객이 노부부들이었는데 특히 내 소파 옆 테이블에서 투덜대는 남편에게 인내심을 갖고 대꾸하는 와이프의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몇십 년 후에 나도 저런 모습일까? 잠깐 상상해 보았다. 건강하면서 우아하고 지혜로운 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방은 주차장 너머의 마운틴 뷰가 보이는 1층에 있어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짐을 옮길 수 있었다. 역사적인 건물은 오래됐지만 그래도 내부는 여전히 클래식하긴 하나 리노베이션을 침실과 욕실 모두 깨끗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 히터를 켠 다음 창가 옆 데스크에 노트북을 설치하고 나서 틈틈이 업무를 처리했다. 인터넷 속도 등 와이파이는 전혀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저녁 산책 후에 호텔 라운지를 지나가는데 호호백발 신사 분이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었다. 영화 음악과 클래식 팝송의 메들리였는데 자기 만의 해석으로 다양한 코드를 구사하시면서 연륜이 느껴질 정도로 물 흐르듯이 즐겁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눈을 감고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잠시 힐링하는 시간을 가졌다. 뉴질랜드의 장점은 액티브 시니어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열린 생각을 가진 시니어들이 자연을 즐기고 맛집을 다니며 웰빙 라이프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많겠지만 내가 지하철을 이용하는 어르신들만 보고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반성하기도. 쉬는 시간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눴는데 근처 동네에 살고 있으며 피아노를 연주한지는 꽤 오래됐다고 하시면서 나보고 피아노를 칠 줄 아냐고 물어보셨다. 고2 때까지 전공으로 해볼까 할 정도로 피아노를 쳤지만 그 이후 대학 입시를 위해 그만두었던 까닭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피아노를 꼭 다시 쳐보라고 권유해주시는데 피아노 조율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시공간에서 낯선 이로부터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 취미 생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어 신기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꼈다.
골룸의 금지된 연못 fobidden Pool에서 느낀 어마 무시한 프로도 경제 효과
다음 날 타우포로 향하기 전 영화 <반지의 제왕>의 골룸 촬영지가 근처에 있다고 해서 잠깐 들렸다. <반지의 제왕>은 뉴질랜드의 경제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로 인한 경제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고 한다.
- 관광 파급효과 38억 달러
- 2001년 - 2003년 영화 때문에 4백만 명의 관광객 방문
- 영화 촬영 고용 인원 2만 3천 명
- 영상 산업이 2010년 기준 연 28억 달러 규모로 성장
이 뒤에는 뉴질랜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는데 이는 피터 잭슨 감독이 키위(뉴질랜드 인)이었고, 뉴질랜드의 풍경과 신화적 콘텐츠와 긴밀하게 연결돼 '스크린 투어리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세금 면제뿐 아니라 홍보비를 지원하고 행정부 내에 ‘반지의 제왕’ 제작 후원 전담 부서를 설치해 영화 촬영을 지원했다. 2012년에는 영화 <호빗> 제작을 위해 노동법까지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한 편의 영화를 시발점으로 거대한 효과를 일궈낸 이 사례는 주인공 프로도의 이름을 따서 "프로도 경제 효과" Frodo Economy Effect라는 새로운 경제 용어를 만들었다.
[관련기사]
국민일보 [촬영 경제효과 노리는 국가들] ‘반지의 제왕’ 뉴질랜드처럼… 될 성 부른 영화 모셔라
https://m.kmib.co.kr/view.asp?arcid=0923060261
직접 가보니 아담한 사이즈의 폭포수가 흐르고 있었고 바위와 푸르른 나무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만 이제 뉴질랜드에서 지낸 지 3개월 차가 되니 여행의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웬만한 자연 풍경에는 큰 감흥 없이 담담했다. 영화에서 어떤 장면을 촬영했는지 금방 떠오르지 않아 궁금했다. 해당 장소에는 영화와 관련된 내용이 담긴 안내문이 전혀 없어서 알 수가 없었다. 쿨하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찾아보니 두 번째 작품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에서 프로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라미르가 골룸을 산 채로 잡아가는 장면에 나온 장소였다. 골룸이 잡은 물고기를 기절시키기 위해 몇 번이고 이리저리 머리를 쳐대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밤 장면이어서 아마도 쉽게 매칭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골룸 안녕~ 우리는 브런치를 먹기 위해 뉴질랜드 최대의 호수 도시 타우포 Taupo로 떠났다.
[골룸 영화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nxD7ashsWu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