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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킨스데이 Jan 23. 2024

갑자기 여행 버디가 생겼다

뉴질랜드_마운트쿡 트랙킹

  뉴질랜드 남섬 퀸즈타운을 여행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두 곳 있었다. 그 유명한 밀포드 사운드와 마운트쿡. 하지만 퀸즈타운에 머물고 있을 때 밀포드 사운드는 갑작스러운 홍수로 인해 교통 통제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환불을 받았다. 아쉬움을 달래며 대신 뉴질랜드에서 3천 미터가 넘는 가장 높은 산, 마운트쿡으로 향했다. 뉴질랜드를 탐험한 영국 해군 장교 제임스 쿡의 이름을 딴 마운트쿡은 원래 고도가 3,764 미터였으나 두 차례에 걸쳐 산 정상의 얼음이 붕괴돼 2013년 기준 3,724 미터로 알려져 있다. 워낙 높고 험해서 공식 인증 산악 가이드를 따라 등정해야 한다고 한다. 퀸즈타운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가량을 달려 드디어 마운트쿡 로지(Lodge)에 도착했다.


안갯속에 가려진 마운트쿡 풍경 © 2020 킨스데이 


  여기에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호주와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산불이 좀처럼 나지 않는데 연간 강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름에는 남섬이 폭우로 인한 홍수가 날 위험이 있어 특별 관리된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다. 숙박비를 절약하기 위해 4명이 방을 같이 쓰는 도미토리형 베드를 예약했는데 우리 방에는 일본 여성, 한국 청년, 독일 중년 여성 그리고 나 이렇게 함께 지내게 됐다. 독일에서 온 밝은 성격의 콜린과 대화가 잘 통해 우리는 산장 주변을 함께 산책하기 위해 나섰다. 윈드브레이커를 입고 크록스 슬리퍼를 신은 상태로 우산을 들고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비가 왔지만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마운트쿡의 풍경을 눈에 담고 경험하고 싶어 우리는 계속 걸었다. 비 오는 날에만 느낄 수 있는 흙냄새, 풀냄새, 바위냄새, 나무 냄새가 뒤섞인 후각의 대향연이 펼쳐졌다. 마운트쿡의 맑은 공기를 최대한 누리고 싶어 크게 일부러 복식호흡을 하기도 했다. 차갑지만 깨끗한 공기가 폐 속에 꽉 들어차니 상쾌한 느낌이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파란색 윈드브레이커를 입고 배낭을 멘 키가 크고 슬림한 백인 청년이 걸어오더니 빠르게 지나갔다. 찰나였지만 마치 아웃도어 화보의 모델이 내 눈앞에서 슬로 모션으로 런웨이를 하듯 그의 모습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됐다. "콜린, 방금 지나간 남자 봤어요? 완전 모델 같았어요. 좀 멋진데." 여행을 하면 이런 예상밖의 멋진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어떤 스토리를 가진 사람일까?" 궁금했다. 가볍게 인사라도 나누며 말을 붙여보고 싶었지만 아무 말없이 빠르게 빗속을 걷어가는 그 백패커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니 아쉬웠다. 어쩌면 이 순간에는 '고독'이 필요한 사람이었을 수도. 빗줄기가 점차 굵어져 우리는 결국 산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카페테리아에서 피자 등으로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있을 하이킹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깨끗하게 유지, 관리되고 있는 마운트쿡 트레일 © 2020 킨스데이


 아침에 눈을 떠보니 다행히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어있었다. 콜린과 나는 산장에서 제일 가까운 트레일을 선택해 걷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정비된 나무 데크를 따라 걸으며 사방으로 펼쳐지는 마운트쿡 봉우리들의 절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켈리, 여기 봐요. 야생화들이 정말 사랑스럽지 않나요?" 콜린은 누런 잡초들 사이로 컬러풀하게 꽃망울을 터트린 야생화를 발견하고 나에게 손짓을 했다. 독일에서 유치원 선생으로 근무했다는 콜린은 아이들 다루듯 소중하게 자연의 생명체를 대하는 순수한 모습이 있어 함께 다닐 때 오히려 내가 배울 점이 있어 좋았다. 오랜만에 마음이 통하는 여행 버디를 만나서 감사했다. 우리는 번갈아 가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독일 얘기, 한국 얘기 등 끝도 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걸었다. 혼자가 아니라서 외로움이 덜했고 콜린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줬다. 케아 포인트에 도착하자 어느 마운트쿡 봉우리 정상 근처에 아직 녹지 않은 푸른색을 띤 빙하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 마이갓, 디스 이즈 어메이징!" 콜린과 나는 마운트쿡의 웅대한 자태에 입을 쩍 벌리고 한참을 감상했다. 선글라스를 꼈지만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나는 대자연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이런 대자연 생태계를 망가트리는 주범이라는 생각이 들어 죄책감과 동시에 'Sustain' 할 뿐 아니라 'Regenerate' 해야 한다는 책임감마저 느꼈다. 아마도 예전에는 저 빙하가 온통 뒤덮였을 텐데 기후 위기로 인해 지금 많이 녹아내린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도시 속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축적된 쓸데없는 노이즈나 방해물, 스트레스 없이 그저 자연과 나, 이 담백하고 심플하면서 고요한 마운트쿡이 성큼성큼 내 안으로 들어와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느낌이 들었다. 빙하에서 녹은 물이 에메랄드 빛 타즈만 호수나 후커 호수가 된 것 같이 내 마음속에서도 분노, 불안, 두려움, 걱정, 근심, 질투, 교만 등 더러운 불순물들이 깨끗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등산을 한 게 아니라서 마운트쿡을 제대로 경험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일부만을 보고 느끼기만 했는데도 엄지 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성스럽고 교훈적인(!) 메시지와 더불어 마음의 정화 작용이 나를 포함한 모든 관광객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살아온 배경에 따라 각자 다른 경험과 느낌, 깨달음을 얻겠지만. 마운트쿡은 원래 거기 있었고 우리기 파괴하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유산(legacy)을 우리 후대에게도 전달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뉴질랜드를 여행하면서 자연스럽게 환경활동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 또한 자연에게서 받은 임팩트가 아닐까? 그래서 여행을 통해 조금씩 배우고 성장하는 것. 충분히 가치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콜린과 나는 다음 날 짐을 싸서 함께 퀸즈타운으로 향했다.


키 포인트로 가는 길에 보이는 마운트쿡 풍경 © 2020 킨스데이
빙하의 자태가 드러나는 마운트쿡 전경 © 2020 킨스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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