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네이피어의 아르데코 문화를 즐기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의 경제, 사회, 문화가 번영했던 '아름다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미국 작가 길 펜더는 우연히 파리의 벨 에포크 시대로 타임 슬립을 하게 되는데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 그 시절의 유명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문화적 매력에 빠져드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방문한 네이피어(Napier) 역시 그와 비슷한 시절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곳이다. 첫날 차로 대충 한 바퀴 타운을 돌았을 때는 "흠, 뭐지? 생각보다 별로인데?" 라며 실망감이 들었다. 해변가도 건물들도 무언가 강렬한 인상을 풍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워낙 이곳이 아르데코(Art Deco)가 유명하다고 들은 데다 마침 1년에 한 번 열리는 "아르데코 페스티벌"을 며칠 앞두고 방문했던 터라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것일까? 하지만 다음날 여유 있게 거리를 걸어 다니며 파머스마켓을 필두로 워터프런트, 시티 뮤지움, 그리고 아르데코 트러스트를 차례로 방문하면서 네이피어의 진면목을 즐기게 되었다. 역시 속단은 금물이다.
네이피어는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서 차로 4시간가량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1931년 혹스베이 대지진으로 인해 256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크게 부상을 당했으며 도시의 상업 중심지가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도시 재건을 하면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도시의 발전과 번영을 기원했다. 이때 아르데코 양식을 반영해 새로운 건물을 세웠다. 아르데코 양식은 수공예 시대에서 산업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등장해 현대 양식의 시초 역할을 했다. 기하학적 패턴과 도드라지는 원색, 고급스러운 소재가 주를 이뤄 장식미와 기능성, 화려함과 단순함이 공존한다. 네이피어는 전 세계에서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아르데코 건축물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아르데코 페스티벌 기간에는 4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해 클래식 카 퍼레이드, 위대한 캐츠비 피크닉, 패션쇼, 콘서트 등 200개 이상의 이벤트를 즐길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니 아르데코 문화로 회복탄력성을 추구한 네이피어라는 도시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 눈에 띈 것은 아르데코 트러스트 시니어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영화 <위대한 게츠비>의 주인공처럼 맵시 있게 아르데코 스타일로 차려입고 클래식카를 몰면서 스토리텔러이자 도시의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투어 프로그램과 샵을 운영하면서 수익 창출을 할 뿐 아니라 네이피어 시티 카운슬과 아르데코 페스티벌도 공동 기획을 하는 등 지역 커뮤니티의 문화, 사회, 경제에 두루두루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들과의 유쾌한 대화를 통해 이분들이 얼마나 네이피어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시니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도시 문화를 주도하는 경우는 처음 본 터라 내심 반갑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도 반짝이는 클래식카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꽃들이 만발한 네이피어의 공원을 걷다 보니 우리나라의 시니어 세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분들이 6.25 전쟁 이후 희생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국가를 빠르게 재건해 주셨기에 2023년 기준 경제 순위 13위에 이르렀다. 이를 기반으로 다음 세대가 음악과 영화, 드라마, 음식, 패션, 화장품 등 전 세계에 K-컬처를 널리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세대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시니어 세대가 배제되기보다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인생 선배로서 스토리 텔러로서 즐겁고 신나게 활동할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기회와 역할이 있다면 어떨까? 네이피어의 아르데코 시니어 회원들처럼 말이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상황에서 말이다. 시니어 프렌들리 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다음 세대와 다음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시니어가 행복한 도시, 네이피어가 우리에게 주는 작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