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울렸다. 오후 3시가 되자 파란 티셔츠에 검정 반바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금발 머리, 까만 머리, 갈색 머리 등 머리 색과 피부색이 다양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던 엄마, 아빠에게 책가방을 맞기고는 너 나 할 것 없이 놀이터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순식간에 학교 놀이터가 아이들로 가득 찼다. 마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발산해 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하듯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힘차게 뛰어놀았다. 놀이터 기구 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그네였다. 그네를 차지한 아이들은 의기양양하게 발을 힘차게 구르며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쳤고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옆에서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까르르 웃음소리와 왁자지껄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네뿐 아니라 뺑뺑이와 미끄럼틀, 시소, 모래사장과 농구코트에도 아이들은 삼삼오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았다. 부모들도 그늘에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아이들이 충분히 놀 수 있도록 기다렸다. 한 30분가량 지났을까. 썰물 빠지듯 아이들이 순식간에 집으로 가고 놀이터가 다시 한산해졌다. 재택 하던 친구가 딸을 픽업하러 간다고 했을 때 따라와서 본, 뉴질랜드 오클랜드 홉슨빌에 있는 "스캇 포인트 스쿨"의 흔한 하교 장면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에 가거나 학원에 가지 않고 학교 놀이터에서 이렇게 한참을 힘차게 뛰어논다고? 그리고 그것을 부모들이 허락하고 차분히 기다려준다고?' 한없이 건강하고 해맑게 학교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뉴질랜드 초등학생들의 모습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내가 아는 한국의 초등학생들은 곧장 집으로 갔다가 학원에 가거나 학원으로 바로 직행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나 때는 어땠지? 나는 국민학교를 나온 '옛날 사람'이라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보아야 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촌에 둘러싸여 있었고 집에서도 10분 내외의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한 번도 부모님이 데려다주거나 픽업해주지 않으셨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동네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곧장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 운동장에는 특별히 멋진 놀이터 기구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아파트 내에도 기본형 놀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학교에 남아서 놀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학원을 다니느라 바쁜 것도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피아노를 배운 게 전부였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초등학생 때 행복했을까? 같은 반 친구들 집에서 놀거나 동네 뒷산에서 아빠랑 언니와 여동생과 뛰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축에 들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다행스럽게) 초등학생을 위한 사교육 시장이 지금 만큼 크지 않았고 선행학습이 유행하지 않아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크지 않았다. 또한 부모님도 딸 셋을 향한 교육열이 그다지 높지 않아서 우리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셨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 조카와 3학년인 둘째 조카의 방과 후 크레이지한 스케줄과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는 한가로운 삶이었다.
다시 뉴질랜드. 여섯 살인 친구 딸 E양은 월요일과 금요일에 한 시간씩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한다.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는 날에는 오후 4시, 그렇지 않은 날에는 오후 3시에 집에 온다. 집에 오면 간식을 먹고 책을 읽거나 TV를 본다. 인형이나 레고 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한다. 테일러 스위프트와 블랙핑크 제니를 좋아해서 가끔 이들의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기도 했다. 오후 6시에 저녁 식사를 마치면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오후 7시 30분이 되면 부모 중 한 사람이 딸을 재우러 간다. 오후 8시부터 부모의 자유 시간이다.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특별히 사교육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뉴질랜드 초등교육 수준은 어렵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선행학습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부모의 설명이다. 대신 E양은 뉴질랜드의 야생 동물과 곤충에 관심이 많아서 책과 유튜브 동영상, 동물원과 박물관 방문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식사 시간에 동물 맞추기 게임을 다 같이 했는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성인이 따라가기 힘든 수준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현지 친구 가족과 지낸 2주 동안 친구 딸과 한국의 초등학생 조카들이 자꾸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2023년 초록 어린이 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아동 행복지수가 4점 만점에서 1.66점으로 2년 전 대비 0.2점 더 낮아졌다고 한다. 조사 결과를 보면 수면 시간은 줄고 공부 시간이 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저녁에 혼밥을 하는 아동의 경우,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더 많고 행복감이 0.8점이나 더 낮았다. 수면도 줄고 미디어 시청이 늘었다. 건강한 모습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사실 맞벌이 가족에게는 평일 저녁에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먼 나라 얘기다. 뉴질랜드 친구네 가족은 부모 중 한 명이 항상 재택근무를 하고 다른 한 명도 오후 5시에는 집에 도착했기 때문에 오후 6시에 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중학교 선생님인 우리 아빠는 오후 5시면 칼퇴근을 하셨고 엄마는 당시 전업 주부였기 때문에 나는 저녁 식사를 가족과 할 수 있었다. 그때는 나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근로시간에서 자유로운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내 조카들은 평일 저녁 식사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구조다. 다른 맞벌이 부모와 마찬가지로 이들 부모의 퇴근 시간이 빠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주 목요일 외할머니가 출동해서 조카들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간식을 챙겨주고 있다.
아이들의 행복이 보장된 삶은 어떤 삶일까. 공부하는 시간을 줄이고 밖에 나가서 놀게 하면 되나? 이미 게임이나 숏폼에 익숙해진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기에 나는 잘 모르겠다. 뉴질랜드에서도 학부모들이 전 세계 대비 아이들 교육 수준 능력 저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인 중심으로 학원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정답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많은 한국 엄마들이 경력 단절을 감수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점에서 아기를 많이 낳으라고 돈을 줄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도 부모도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주고 행복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웰빙 라이프는 남반구의 섬나라 뉴질랜드에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젯밤에 가족 카톡방에 농구를 하는 첫째 조카 사진과 축구를 하는 둘째 조카 사진이 올라왔다. 다행히 둘 다 건강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