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아라타키 비치에서의 다짐
월요일 아침 8시. 뉴질랜드의 북섬 베이 오브 플렌티의 중심도시 타우랑가는 주말이란 잠에서 깨어났다. 출근 차량으로 도로가 다시 복잡해지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들과 빠른 걸음의 학부모들이 보행로를 차지했다. 쓰레기 수거차가 동네를 다니며 쓰레기통을 비웠고 동네 카페에는 출근길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여기까지는 한국이나 뉴질랜드나 어디에서든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월요일 아침 도시 풍경이다.
하지만 나는 출근하지 않았다. 대신 레깅스와 운동화를 신고 선글라스를 챙겼다. 그리고 아라타키 해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에서 새롭게 시작한 나의 아침 루틴이다. 해변가를 걷는 것. 그리고 걸으면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 여기까지 말하면 혹자는 "팔자 좋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다들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쳇바퀴 돌듯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돈을 벌고 있을 때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한량같이 뉴질랜드의 바닷가나 거닐고 있으니 말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해서 소위 좋은 대학에 가고 근 20년 넘게 직장 생활, 대학원 졸업 그리고 프리랜서 생활을 한 결과, 내가 얻은 것은 약간의 저축과 번아웃이었다. 안타깝게도 비트코인, 부동산, 주식 투자 등과는 거리가 멀어 파이어족이나 영 앤 리치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들쭉 날쭉한 수입으로 불안한 노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행이라면 부양해야 할 부모님이나 자식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없다는 정도일까. 4년 전 뉴질랜드 타우랑가에서 열린 코하우징 워크숍에서 만난 남자친구 덕분에 매년 뉴질랜드를 방문하고 있다. 나에게 주는 안식월이란 선물이다. 그래서 나는 월요일 아침 출근 대신 해변가를 걸을 수 있는 "시간의 플렉스"를 누리고 있다. 내 시간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40대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시간의 가치를 회사가 정해주는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정할 수 있도록 퍼스널 브랜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다들 신문 칼럼이나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세바시 같은 방송에 출연하고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10년 정도 마케팅과 브랜드 매니지먼트 업무를 했지만 막상 나에게 적용하려니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뉴질랜드에서 마냥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행도 하고 재충전을 하면서 올해 상반기와 하반기를 위한 먹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또한 뉴질랜드의 어포더블 하우징, 가드닝, 퍼마컬처, 에코 빌리지 커뮤니티 등에 대한 리서치를 나만의 속도로 병행하고 있다. 수입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경제적 수준에 맞춰 소비생활을 하는 것도 연습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뉴질랜드에서는 화장품이나 옷, 명품백, 수입차 등 품위 유지용 소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부와 명성에 대한 도전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지내다 보니 숲으로 둘러싸인 레이크 뷰나 오션 뷰의 전망 좋은 집에서 에너지와 물, 텃밭 가든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가끔 요트 여행을 하는 "우아한 오프그리드의 삶"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100세 인생에서 아직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길기 때문에 남이 정한 속도가 아닌 내 속도로 차근차근 준비해서 성취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어느 뉴질랜드 해변가 도시에서 몸과 마음의 근육, 회복탄력성을 키우고 있다.
지난주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떠올랐다. <살아가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란 책에서 97세 어르신이 매일 아침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다른 사람이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나는 매일 노력한다네." 분명한 목적성을 가진 삶의 중요성 그리고 그 목적성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탁 트이게 끝도 없이 펼쳐진 아라타키 해변에서 하늘빛에 반짝이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나는 다짐했다. "우아한 오프그리드의 삶"을 향한 긴 여정을 통해서 내가 배우는 깨달음과 경험을 부지런히 나누고 돕겠다고.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월요일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