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타우랑가 파머스 마켓을 다녀오다
화창한 토요일 아침. 현지에 사는 친구와 나는 파머스 마켓에 가기 위해 서둘렀다. 일반적으로 뉴질랜드의 파머스마켓은 토요일 오전에 일찍 열린다. 20년이 넘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타우랑가 파머스 마켓의 경우, 타우랑가 초등학교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7시 45분부터 오후 12시까지 운영을 한다. 한국의 마르쉐 파머스 마켓이 서울 시내에서 혜화, 합정, 성수 등 정기적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주말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열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아마도 뉴질랜더들은 토요일 오전에 파머스 마켓에서 필요한 장을 보고 아침 혹은 점심을 해결한 다음 오후 시간을 따로 활용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선호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에 반해 서울에서는 파머스 마켓에 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토요일 이벤트가 될 수 있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셀러와 불금을 즐기고 토요일 늦잠을 자고 싶은 소비자를 배려해 해당 시간을 선택한 게 아닐까.
삼삼오오 장바구니를 들거나 바퀴 달린 카트를 끌고 사람들이 파머스 마켓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에서부터 청소년 아이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엄마, 데이트를 위해 나온 연인, 컬러풀한 원피스에 목걸이와 모자로 한껏 꾸미고 나타난 멋쟁이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서로 인사를 하면서 근황 토크를 하는 모습을 보니 파머스 마켓이 지역 사회에서 ‘만남의 광장’ 역할도 담당하는 것 같았다. 뉴질랜드가 우리나라 대비 국토 면적은 대략 2.7 배인데 반해 인구수는 1/10로 워낙 인구 밀도가 낮은 편이라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어뿐 아니라 한국어와 중국어, 정체 모를 외국어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나도 여유롭게 마켓을 둘러보았다. Free range (자유방사형, 우리나라로 치면 1번) 달걀을 판매하는 부스에는 벌써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근처 산지 과일 부스와 채소 부스에도 고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생화를 파는 부스 역시 손님으로 북적였고 콤부차를 직접 만들어 파는 젊은 사장님이 고객과 대화하면서 호탕하게 웃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즉석 생과일주스를 파는 부스는 완판해 부스를 일찌감치 접었고, 우리나라 영화관에서 파는 캐러멜 팝콘과 비슷한 케틀 팝콘 부스도 이 날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였다. 치즈와 꿀, 건강식 베이커리, 달달한 각종 디저트, 크레이프와 덤플링, 볶음 누들 등 다채로운 식재료와 먹거리가 파머스 마켓에 오는 사람들의 허기를 기분 좋게 채워주었다.
제품에 대한 정보는 당연하고 직접 생산하기 때문에 자부심이 넘치는 판매자와 그 가치를 알아보거나 궁금해하는 소비자들이 부스마다 정겹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먹을 식재료를 구매하는 활동이 이렇게 또 하나의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파머스 마켓의 매력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왔다. 낯선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는 “E형“ 문화 때문일까? 밝고 신나는 바이브에 이 동네에 함께 살면서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 파머스 마켓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버스킹‘이었다. 그냥 유명한 노래를 불러서는 주목을 받기 쉽지 않은데 이 날은 마오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우쿠렐레를 신나게 연주했다. 연주자들이 흥겨우니 듣는 사람도 즐거웠고 자연스럽게 앞에 놓인 기타 케이스에 현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뉴질랜더들은 결코 인색하지 않아 보였다. 일치감치 뮤직 부스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앞에 앉아 음악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금발의 꼬마 아가씨가 연주에 맞춰 즉석 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어서 동네 파머스 마켓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고퀄의 기타 연주가 30분가량 진행된 다음, 두 명의 청소년이 나와 미국 캠프를 가기 위한 펀드레이징을 위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마치 영화 '코다'에 나오는 여주인공과 남자 사람 친구처럼 앳된 모습이었지만 실력은 기대보다 출중해 미래의 닐영(Neil Young)과 조니 미첼(Joni Mitchell)은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이렇게 시니어 세대와 젊은 세대로 구성된 흥겨운 수준급 버스킹 연주와 이를 함께 즐기고 기꺼이 현금으로(!) 화답하는 관객의 호응 모두 파머스 마켓의 퀄리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도 즉석에서 간 생과일주스에 올가닉 에그 베이컨 버거를 먹으면서 버스킹을 들으며 파머스 마켓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겼다. 그러다 이 파머스 마켓에 없는 세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어딘가에서 물건을 갖다 파는 도/소매상이 없다. 오직 검증된 현지 특정 지역과 타우랑가에서 200km 내외에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생산자만이 셀러로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정부의 식품 품질 안전 인증도 받아야 한다. 게다가 선발되면 40시간의 교육을 별도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작물에 얽힌 스토리와 다양한 정보를 알고 제공하고 고객은 그만큼 품질을 믿고 살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다품종 소량 판매만 이뤄진다. 둘째, (당연히) 여기에는 소형 비닐봉지 소비가 없다. 직접 밭이나 과수원에서 수확한 채소와 과일을 정성스럽게 그대로 가져오기 때문에 고객은 원하는 개수만큼 골라 들고 온 장바구니에 담으면 된다. 장바구니를 미처 준비하지 않더라도 그냥 손에 들거나 종이봉투를 사용하기 때문에 비닐봉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셋째, 종이 영수증이 없다. 현금 중심으로 판매가 이뤄지고 있어 인포메이션 부스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으며 요즘은 카드를 받는 셀러도 늘어나고 있지만 종이 영수증 발급은 없다. 이렇게 세 가지가 없지만 여기에만 있는 중요한 특징 또한 발견했다. 바로 믿을 수 있는 식재료로 사람(생산자)과 사람(소비자)을 연결해 주는 것. 이게 바로 파머스 마켓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타우랑가 파머스 마켓은 그 본질을 진정성 있게 추구함으로써 브랜드를 구축하고 지역 커뮤니티 안에서 잔잔하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문득 우리 동네 전통 시장을 떠올렸다. 가끔씩 짐꾼 역할로 일흔 되신 엄마를 따라 카트를 끌고 장을 보러 다니곤 해서 나에겐 익숙한 장소다. 예전에는 전통 시장에 가면 넉넉한 인심이 넘친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원하는 물건을 사고 정해진 값을 치르는 게 전부가 되면서 시장 가는 재미가 없어졌다. 그냥 대형 마트 보다 좀 저렴하게 사는 정도? 아니면 꽈배기나 호떡을 사 먹을 수 있는 정도? 우리가 나름 단골이라고 부르는 파김치며 나물이며 맛있는 반찬을 파는 아주머니가 자주 안 나오셔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 경험도 있다. 가능하면 검은색 소형 비닐봉지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건만 채소나 과일은 대부분 이미 소분 비닐 포장이 되어있어 플라스틱 봉지를 피하기는 여간 쉽지 않다. 대부분 국산이겠지만 생산지 표기가 안 돼있기도 했다. 나는 식품 마케팅 경력이 있기도 하고 먹는 것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라 위생을 포함해서 맛과 품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경우 좀처럼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정부에서는 전통 시장을 살리려는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단순히 주차장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지붕을 씌우고 가판대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하드웨어의 문제의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가격 논란이 있었던 광장 시장, 백종원 씨가 손을 댔던 예산 시장 등의 경우를 보면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판매 활동과 구매활동 자체가 즐거우면서 서로 정당한 가치를 교환할 수 있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 무형의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그런 전통 시장으로 진화해야 하고 이를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비자는 그냥 또 하나의 평범한 회센터보다는 제주도 “해녀의 부엌”처럼 해녀들이 직접 캔 해산물 요리를 먹으면서 그들의 스토리가 담긴 퍼포먼스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가치, 동네와 관련된 스토리, 시장 상인들의 스토리, 제품에 얽힌 스토리를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지방의 5일장처럼 지역사회의 만남의 광장 같은 그런 가치도 추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다행히 이런 이상적인 마켓의 형태를 마르쉐가 나름 열심히 주도하고 있다. 혹자는 전통시장과 파머스마켓은 속성 자체가 다르다고 지적할 수 있다. 맞다. 태생이 다르다. 하지만 소비자의 기대도 그러할까? 구매활동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전통시장 만의 차별화 포인트를 만들어야 한다. 가격만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정겨움과 품질을 강점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물론 당장에 이마트와 편의점, 쿠팡, 마르쉐와의 경쟁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로 인해 서민들이 지갑을 닫는 이 위기가 전통 시장에게는 충분히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가심비, 가성비, 스토리와 경험을 중요시하는 소비자들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지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채소나 과일을 판매하시는 분들은 농사펀드나 마켓 컬리처럼 생산 지역이나 생산자에 대한 스토리를 손쉽게 제공하거나 못난이 채소, 못난이 과일도 취급해 버려질 농산물을 “Rescue” 하는데 기여하면서 특정 물량을 한정해 판매하실 수 있다. ‘나 혼자 산다’에 여러 번 깜짝 출연한 금남시장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전통시장도 충분히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 나도 언젠가는 밝고 신나는 바이브가 넘치는 동네 전통 시장을 방문할 수 있기를 손꼽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