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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킨스데이 Mar 19. 2024

뉴질랜드의 양양, 라글란에 빠져들다


  우리나라에 서핑 도시 양양이 있다면, 뉴질랜드 북섬에는 라글란이 있다. 사실 섬나라인 뉴질랜드에는 서핑 도시가 많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5일 동안 머문 라글란은 '서핑의 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사실 나는 서퍼는 아니다. 서핑 레슨을 여러 차례 받아 봤지만 아직 바닷물이 무섭다. 어쩌다 제대로 된 파도를 만나 라이딩을 했을 때의 그 짜릿한 쾌감을 살짝 간만 본 경험이 있긴 하다. 그래서 왜 서핑을 하는지 그 매력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이해한다. 하지만 가을 날씨라 드라이 슈트를 입어야 할 만큼 바닷물 온도가 낮기도 하고 로컬 서퍼들이 신나게 라이딩을 즐기는 광경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기도 해서 라글란에서는 감히 서핑에 도전하지는 못했다. 자꾸 연습을 해야 실력이 늘긴 하겠지만 가끔은 한 발짝 물러서서 서퍼들의 움직임을 감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라글란 시티 센터에 있는 나무에 아이들이 올라타며 놀고 있는 광경 © 2024 킨스데이


   해밀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라글란 시티 센터에 도착한 날에는 비바람이 몰아쳤다. 사람의 흔적도 볼 수 없고 동네 자체가 어둡고 우중충해 보여 적잖이 당황했다. 심지어 관광안내센터의 담당자조차도 "Rubbish Weather(거지 같은 날씨)"라며 굉장히 미안해할 정도였다. 할 수 없이 우리 일행은 숙소에서 넷플릭스를 보며 휴식을 취했다. 날이 갠 후에야 본격적으로 라글란을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었다. 우선 수 백 년은 돼 보이는 커다란 편백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키위 아이들이 나무를 타면서 놀기도 하고 그 앞에 놓인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는 디지털 노매드도 있었다. 이 나무들은 라글란을 지키는 수호신 같이 성스럽고 고결한 인상을 풍겼다. 이 나무들을 중심으로 카페와 레스토랑, 헌책방과 바버샵, 정육점과 친환경샵, 바와 클럽, 편집샵, 갤러리, 비건 베이커리, 슈퍼마켓 등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특히 다양한 편집샵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파타고니아 브랜드를 포함해서 각종 서퍼들을 위한 제품을 판매하는 스포츠 편집샵과 그루브 음악과 벽에 걸어둔 페인팅이 감성적인 보헤미안 스타일의 빈티지 편집샵, 전 세계의 온갖 아기자기한 아이템을 멋지게 디스플레이해서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잡는 소품 편집샵도 있었다. 핑크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눈에 확 띄는 선명한 색상의 레스토랑이 있는가 하면 편안한 비건 느낌을 지향하는 레스토랑도 있었다. 앤티크 미니어처로 장식된 초콜릿 샵도 있고 무엇보다 서퍼들의 취향을 고려한 중고책을 빼곡하게 진열한 미니 헌책방은 여러 번 방문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골목골목마다 벽화나 정형화되어있지 않아 개성적이고 독특한 가게 간판, 메뉴 보드를 보면서 자유로우면서도 예술적인 바이브를 느낄 수 있었다. 이에 더해 성수기인 여름을 살짝 비켜갔지만 여전히 구릿빛 피부에 민소매 티셔츠와 반바지, 맨발의 자유로운 영혼들이 길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낭만이 가득한 서핑 도시임에 틀림없었다.   


자유롭고 예술적인 라글란 시티 센터 풍경과 내가 주문한 식음료  ©2024 킨스데이

     

  라글란의 메인 포인트(지역의 가장 유명한 서핑 장소)는 뭐니 뭐니 해도 마누 베이(Manu Bay)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길기로 유명한 레프트 핸드 브레이크(파도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서지는 형태)를 탈 수 있는 곳이다. 마침 운 좋게도 저녁 선셋을 보러 나갔다가 잔디밭에 앉아 서핑 향연을 무료로 관람하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이었는데 우리 옆에는 피크닉을 나온 듯 자리를 잡고 대마초를 피우고 와인과 맥주로 불금을 즐기는 청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퇴근을 하자마자 주차를 하고 그 자리에서 드라이슈트로 갈아입은 다음 서핑 보드를 들고 바다로 뛰어드는 서퍼들을 볼 수 있다. 힘차게 패들링(서프보드 위에 엎드려 양손으로 물을 저어 앞으로 나가는 기술)을 하며 포인트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뭐랄까,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워라밸을 누리는 자들이 아닐까 싶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파도 너머 뒤편에서 서퍼들이 라인업을 하고 파도를 기다리는 모습. 그리고 재빠르게 라이딩을 하면서 다양한 기술을 시도하는 모습. 그러다 물에 빠지거나 다시 패들링을 해서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 바다라는 거대한 창조물 안에서 이들은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인내를 가지고 겸손하게 때를 기다리며 순종하는 모습.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그 순간을 만끽하는 모습.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파타고니아 창립자인 이본 쉬나드가 떠올랐다. 서퍼이자 락클라이머였던 그가 왜 파타고니아의 미션 스테이트먼트를 "Saving Our Home Planet"이라고 정하면서 환경 무브먼트에 올인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였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라글란 해안가 전경 © 2024 킨스데이


  마누 베이에서 동쪽에 있는 응가루누이 비치(Ngarunui Beach)는 초보자들이 서핑을 배우기에 적합해 보였다. 주차장에 서핑 레슨 강사들과 보드 렌털 업체들로 구성된 트럭들이 상주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모래사장에는 소수정예로 서핑 레슨을 받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은 특별히 서핑을 하지 않아도 긴 검은 모래사장을 따라 산책하거나 언덕에서 전체 광경을 감상할 수 있는 스펙터클한 풍경이 돋보이는 곳이었다.  


응가루누이 비치 전경 © 2024 킨스데이

  

  서핑 외에 다른 액티비티를 하고 싶다면 시티 센터 곳곳에 요가, 명상, 마사지, 기타 레슨, 클럽 등 갖가지 정보들이 붙어있으니 이를 참고하면 된다. 라글란 주변에도 볼거리가 있다. 라글란에서 남쪽으로 차로 15분 거리 내에 길이 55m 규모의 "브라이덜 베일 폭포(Bridal Veil Falls)"가 있는데 신부의 면사포같이 생겨서 이름이 붙여진 곳인데 위, 옆, 아래 전망대에서 폭포의 웅장하고 위엄 있는 장관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반드시 방문해 보기를 추천한다.


길이 55m의 브라이덜 베일 폭포 전경 © 2024 킨스데이

 

  궂은 날씨여도, 서핑을 하지 않아도 라글란은 충분히 내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처음에는 5일을 어떻게 버틸까 걱정했지만 나도 모르게 그 순수하고 유니크한 매력에 빠져들어 시간이 흘러가는 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서퍼로서 당당하게 라글란을 방문하고 싶다. 아니면 적어도 응가루누이 비치에서 일대일 서핑 레슨을 받아보리라. 잠시나마 멋지게 라이딩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라글란을 떠나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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