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롱패딩입니다.
저는 11월이 되면 어김없이 옷장에서 다크 그레이색 롱패딩을 꺼내 입습니다. ‘패딩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겨울 코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수하는 친구를 볼 때면, 저는 그저 속으로 웃습니다. “나쁜 날씨는 없다.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 있을 뿐이다.” 이 스웨덴 속담을 저는 전적으로 믿거든요.
내복에 기모 상·하의, 기모 레깅스, 종아리까지 오는 긴 양말, 패딩 부츠, 장갑, 그리고 마스크까지. 여기에 독감 백신 접종까지 마쳤으니, 시베리아 대륙의 고기압이 몰고 오는 북서풍 한파에도 끄떡없습니다. 이번 겨울을 감기 없이 보내겠다는 저 나름의 강한 의지이자 대비입니다. 저는 이런 복장을 이듬해 4월까지 고수합니다.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프리랜서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요. 겨울에는 멋 부리다 얼어 죽는다는, 100% 실용성 추구 성향 탓도 있을 겁니다.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 옷 소비는 확실히 줄었습니다. 재택근무와 온라인 업무가 가능해진 것도 큰 이유고요. 중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친구가 옷장을 개방해 바자회를 열었을 때 얻어온 초록색 두꺼운 목폴라 니트는 제 크리스마스 시즌 유니폼입니다. 오프라인 미팅이 있는 날엔 패밀리 세일 때 큰맘 먹고 샀던 검은색 라운드넥 캐시미어 니트에, 15년 전 구매한 블랙 스카프, 2년 전 고속터미널 매장에서 산 검정 기모 바지를 매칭합니다. 체형 변화가 크지 않았기에 가능한 조합이지요.
그래서 옷을 살 때도 그해 유행보다는 클래식한 기본 디자인을, 이미 가진 옷들과의 조합을 먼저 떠올립니다. 예전에 읽은 기사 하나가 기억에 남습니다. 무신사 스탠다드가 성공한 이유로 ‘고품질 원단 추구’와 ‘기본에 충실한 심플한 디자인’을 꼽았던 내용이었죠. 유행은 돌고 돌아오지만, 기후는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주변 시선보다 나만의 기준을 지키는 옷차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쇼핑할 때 도파민이 가장 높아진다는 지인이 있습니다. 퇴사 기념으로 몇 천만 원짜리 명품 시계를 샀더군요. 개인의 취향일 겁니다. 다만 저는 예전보다 소유욕과 쇼핑욕이 많이 줄었습니다. 쟁여놓아도 결국 짐이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요즘은 책 한 권을 사는 일마저 신중해졌습니다. 명품을 갖는 것보다, 내가 명품이 되는 일이 더 우선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첫 회사에서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릅니다. 개인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최고급 럭셔리 경험을 인센티브로 제공하던 곳이었는데, 입사 교육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지원하는 직원들이 그 럭셔리한 간접 경험을 자기 삶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보면 할리우드 스타들의 집, 패션, 레스토랑, 소비 브랜드가 넘쳐납니다. 그들은 그만한 수입과 이미지가 필요한 사람들이니까요. 저 같은 소시민은 형편에 맞게, 알뜰하게 사는 편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00세 인생에서 이미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긴 노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한숨이 먼저 나오니까요.
그래서 저는 실용성과 검소함을 기본으로 하되, TPO(시간 Time, 장소 Place, 상황 Occasion)는 고려하려 합니다. 그렇다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건 아니고, 최소한의 신경은 쓰는 정도입니다. 제 패션 추구미는 정려원 배우와 영화 <인턴〉속 패션 스타트업 CEO 줄스(앤 해서웨이), 그리고 시크한 프렌치 우먼 패션 스타일입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히 스타일리시하고, 나이가 들어도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스타일. 얼씨 룩과 올드머니 룩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요. 그러기 위해서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적정 체중과 근육량 유지라는 현실적인 결론에 다다릅니다.
오늘도 영하의 날씨가 이어집니다. 어제 내린 눈이 조금은 녹기를 바라며, 베란다에 걸어둔 롱패딩을 이제 들여와야겠습니다. 빛바램 없이 오래 입으려면 보관도 중요하니까요. 제 겨울을 책임져주는 소중한 친구와, 이번 겨울도 무사히 동행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그런 패션 최애템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