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난간대 같은 사람

비둘기에게도 쉼터를 제공하는 그런 편안한 사람이 되는 날까지.

by 킨스데이

11층.
제가 사는 아파트는 남향 11층 2호입니다. 낮에는 해가 깊숙이 들어오고, 구축 아파트라 동 간 간격도 넉넉한 편이에요. 키 큰 나무들이 사계절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봄엔 벚꽃이 흐드러지고, 여름엔 초록이 짙어지고, 가을엔 노랑과 빨강이 섞여 바스락거립니다. 겨울엔 가지마다 눈이 내려앉아 잠시 다른 세상에 온 듯하지요.

그래서인지 이 아파트에는 새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까치, 비둘기, 까마귀, 참새, 이름 모를 새들까지. 아침에 새소리로 눈을 뜨는 날도 있어요. 햇살이 따사롭거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저희 집 베란다 안전난간대는 새들의 쉼터가 됩니다. 쭈르륵 줄지어 앉아 털을 고르고, 서로 뭐라고 재잘거리기도 하지요. 몇 년이 반복되다 보니 철 난간대가 새똥으로 부식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래도 그냥 두었습니다. 맘 편히, 이들에게 선택받았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도심에서 살아가는 게 새들에게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잠시 쉬어갈 자리가 필요했겠지요.


우리집 비둘기 쉼터 (사진 제공:킨스데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도 결국, 그런 자리를 찾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언제 어디서 만나도 편안한 사람. 내 이야기를 재촉하지 않고, 끊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 맞장구를 치되 과하지 않고, 응원을 하되 부담 주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 곁에는 자연스럽게 다시 가고 싶어 집니다. 마치 새들이 다시 난간대로 돌아오듯이요. 100세 인생에 그런 친구 한 두 명이라도 있으면 잘 살았다 싶을 것 같아요. 반대로, 어느 순간부터 ‘나’가 중심인 사람들을 조금씩 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친절한 척하지만 결국 이기적인 에고를 드러내는 사람들. 남의 성장을 불편해하고, 남 잘되는 걸 배 아파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괜히 움츠러들지요.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좌의 게임>의 램지 볼튼처럼, 이해할 서사조차 없는 ‘묻지 마 사악함’ 앞에서는 채널을 돌리고 싶어 집니다. 현실에서도 본능적으로 그런 에너지를 피하고 싶은 존재일 겁니다.


다행히 돌아보면, 제 삶에는 그런 극단적인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면 별의별 고객을 만나지만, 이건 아니다 싶을 땐 가능한 한 빨리 발을 빼는 게 최선이고, 그럴 수 없을 땐 젖은 낙엽처럼 자세를 낮추고 프로젝트가 빨리 끝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요. 제 그릇이 좀 더 크다면,

그런 빌런조차 포용하며 일로 증명해 내는 탁월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상은 이상일뿐,

현실에서는 아직 허우적거리며 회피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막, 그 연습을 시작하는 단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점점 ‘경탄’ 하지 못한다고요. 그 이유는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뜨끔했습니다. 맛집을 가도, 영화를 봐도, 여행을 가도 늘 시큰둥한 태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제 모습이 떠올랐거든요. 어느새 그게 ‘나의 전문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도 그렇게 빠르게 스캔하고, 단정 짓고요.


요즘 제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이진이’가 자주 뜹니다. 그 아이의 순수한 표정과 표현을 보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나도 저랬나? 강아지와 고양이 영상을 보며 괜히 엄마 미소를 짓는 제 자신을 발견하며, 2026년을 맞아 조용한 목표를 하나 세웠습니다. 만다라트에 추가해야 할 항목이지요.

하루에 한 번, 감사하기.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평가 대신 경탄하기.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잠시 앉아 쉬어가도 좋은 사람, 말없이 머물다 가도 부담 없는 사람, 베란다 난간대 같은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고객들도 다시 저를 찾을 테고요. 입소문을 듣고 새로운 고객들도 찾아오지 않을까요(제발~). 새들이 우리 집 난간대를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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