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브랜드를 좋아해요.
"좋아해요."
이 말은 보통 사람에게 하죠. 그런데 저는 가끔 브랜드에게도 이 말을 합니다. 소비재 마케팅으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나이가 들수록 취향은 점점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브랜드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어요. 어떤 브랜드는 오래 곁에 두고 싶어지고, 어떤 브랜드는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경험의 폭이 넓어질수록 극단은 더 분명해집니다. 한없이 찬양하게 되는 브랜드가 있는 반면, 아주 사소한 계기로 바로 등을 돌리게 되는 브랜드도 생기죠. 그 차이를 만드는 건 결국 ‘스토리’였습니다. 누가 이 브랜드를 만들었는지,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지금 이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팀은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알게 되는 순간, 브랜드와 나 사이에는 단순한 소비를 넘어선 ‘관계’가 생깁니다. 애착 브랜드가 될지, 아니면 스쳐 지나갈 브랜드가 될지는 바로 여기에서 갈립니다. 이 관계를 만들어주는 강력한 자석이 바로 '스토리텔링'입니다. 서로 다른 극이면 끌어당기고, 같은 극이면 멀어집니다. 이런 스토리는 흔히 레거시, 즉 유산이라고 불리지만, 저는 그것이 단순히 역사가 오래됐다고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품이나 서비스의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야기는 힘을 잃습니다. 오늘은 제가 경험을 통해 좋아하게 된 브랜드들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창업자 이본 쉬나드 이야기 워낙 유명해서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을 읽어보시면 충분합니다. 중요한 건 그의 비즈니스 미션, “We are in business to save our home planet,” 이 문장이 슬로건에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 조직에서 파타고니아와 콜라보를 진행하며, 환경 문제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와 관점을 어깨너머로 배운 경험이 있어 더 신뢰가 갑니다. 최근에는 웹 세일에서 눈팅만 하던 노란색 패딩을 결국 질렀고요. 내돈내산 빨간색 노트북 배낭, 하늘색 플리스 재킷, 아이보리 베스트, 네이비 티셔츠, 블루 힙색 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비는 당분간 자제하려 합니다. 가격이 센 만큼 오래 입고, 오래 쓰는 것. 그게 아마 파타고니아가 말하는 책임 있는 소비일 테니까요.
무인양품은 늘 “This is enough”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브랜드입니다. 간소하고 절제된 미니멀리즘, 그리고 품질. 요란하지 않은 태도에서 일본 브랜드 특유의 미감이 느껴집니다.
도쿄에 사는 이모 덕분에 여러 제품을 써보며 그 철학이 말이 아니라 제품에 잘 녹아 있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파자마와 수면 양말, 목도리부터 미니 배낭과 모자, 다이어리와 볼펜까지 제 일상에 밀착된 브랜드입니다. 만족도는 당연히 높고, 가격 또한 합리적입니다. 환경을 생각해 종이 옷걸이를 사용하고, 반납하면 스탬프를 찍어주는 캠페인도 인상 깊었습니다. 예전 조직에서 일본인 부사장님과 미팅을 했을 때, 매장이 있는 로컬 지역을 중심으로 선한 영향력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느낀 기억도 남아 있고요. 도쿄 여행 중 무지 카페에서 긴 줄을 서서 식사를 했던 경험은, 제품 경험이 공간 경험으로 확장되는 그들의 큰 그림을 체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음식은 깔끔하고 담백했고, 자연스럽게 ‘무지 호텔에도 한 번쯤 머물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이가 들수록 담백하지만 묵직한, 진국 같은 브랜드에 끌립니다. 무인양품은 그렇게 같이 늙어가고 싶은 브랜드입니다.
저는 장인 정신을 좋아합니다. 포터는 1962년 바늘 한 땀 한 땀의 영혼을 담아 현대적인 디자인과 실용성을 더해온 브랜드로 유명하지요. 친구에게서 나눔 받은 지갑을 사용하고 있는데, 얇고 가벼워 만족도가 높습니다. 환율이 내려가도 가방은 여전히 비싸고, 딱히 필요도 없어서 구매 계획은 없습니다만, 부산 한정 에디션을 본 순간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업사이클링 백의 시조새'라고 적인 기사 제목을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스위스 출신 디자이너인 프라이탁 형제가 방수 가방을 찾다가 트럭 방수천과 자동차 안전벨트, 자전거 고무 등을 이용해서 세상에 하나뿐인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특별한 마케팅도 없고, 친절하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메이드 인 스위스답게 가격도 만만치 않죠.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자발적이고 강력한 팬덤을 가진 브랜드입니다. 사용자들끼리만 공유되는 묘한 공감대가 있다고들 하네요. 저는 오래전 스타트업 행사에서 명함 케이스를 선물로 받아 지금까지 아껴 쓰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스위스 프리미엄 브랜드, 큐라프록스. 모든 사람이 스스로 구강 건강을 관리할 수 있도록 좋은 도구를 만든다는 철학을 가진 브랜드입니다. 솔직히 가격은 손이 떨립니다. 1개에 8,500원. 알록달록한 손잡이는 플라스틱이고, 프리미엄의 실체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치과의사의 추천으로 사용해 본 부드러운 초미세모 칫솔은 만족도가 최상입니다. 이제야 내 인생 칫솔을 찾았구나 싶더라고요. 지인이 올리브영에서 판매하는 동일 브랜드 여행자세트를 선물해 줬는데 외출할 때는 항상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착템이 되었습니다.
본사 홈페이지를 뒤지다 창업자 Ueli Breitschmid의 이야기를 발견했는데, 파타고니아처럼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대한 서사 대신, 기업가로서의 철학과 태도를 담담하게 기록해 둔 점이 오히려 인상적이었습니다. 삼대째 이어지는 가족 기업 클라덴의 다음 행보가 더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K-뷰티 시대에는 작은 브랜드에게도 기회가 생깁니다. 여성 대표가 직접 나와 '울릉도에서 자라는 어성초'로 만든 제품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구매했는데, 어느새 저의 기초 케어라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비록 메디큐브 브랜드처럼 짧은 기간에 유니콘이 될 가능성은 없을지라도, 이렇게 솔직하고 담백한 작은 브랜드도 좋아합니다. 괜히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오늘 소개한 브랜드들은 모두 ‘처음부터 대단해서’ 좋아하게 된 건 아닙니다. 써보고, 들여다보고,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관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작은 브랜드 대표님들로부터 “우리는 스토리가 없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안타깝습니다. 고객이 궁금해하는 건 거창한 성공담이 아닙니다. 이 제품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어떤 기준으로 오늘도 이 일을 이어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이 브랜드를 좋아하는지. 그런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돈을 써서 마케팅을 하기 전에,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 그게 가장 강력한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이면에 열정 페이나 노동 착취 같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면, 브랜드는 타이타닉호처럼 순식간에 가라앉겠지만요.
올해는 저 역시 브랜드 경험을 더 확장해보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태도와 철학이 담긴 물건과 서비스를 만나는 일은 여전히 설레니까요. 여러분은 어떤 브랜드에게 “좋아해요”라고 말하고 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