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가 엎어질 때 프리랜서를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
프로젝트는 언제든 엎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순간, 프리랜서만 그대로 맞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날씨, 재해, 정치 경제 상황, 후원사의 사정, 주최 측의 판단. 이유는 늘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를 위해 이미 투입한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다음 일을 미뤄가며 선택한 결정’까지 누가 책임져주지는 않습니다.
촬영을 모두 마쳤고 편집 단계까지 들어갔지만, 주연 배우 리스크로 작품이 통째로 폐기됐다는 뉴스. 이런 소식을 볼 때마다 저는 늘 같은 생각을 합니다.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에게는, 저 상황이 곧 내 얘기일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우리는 흔히 ‘표준계약서’를 기반으로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일이 꼬였을 때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그 기준이 변상이나 소송까지 이어지기도 하고요. 다행히 아직까지 그런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지는 않았습니다.
계약서를 보고,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한 순간
한 번은 지인의 부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기획 단계부터 함께 준비하며 서로의 장점을 살려 윈윈 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고, 처음 함께하는 프로젝트라 기대도 컸습니다. 며칠 뒤 계약서 초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서를 읽으며 망설이게 됐습니다.
'이 프로젝트, 정말 해야 하나?’
계약서에는 '갑'과 '을' 대신 ‘동’과 ‘행’이라는 표현이 쓰여 있었지만, 내용에서는 파트너십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표현만 중립적일 뿐, 실제로는 한쪽에 책임이 과도하게 몰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확신을 갖기 위해 챗GPT, Perplexity, Claude 등 여러 AI 툴로 계약서를 리뷰했습니다. 결론은 비슷했습니다. 한쪽이 명백히 불리한 계약이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지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계약서… 무서워요.”
그래서 내가 고친 조항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계약 해지 조항이었습니다.
- 행이 정당한 사유 없이 업무를 거부하거나, 수행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판단’의 주체가 너무 모호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수정 제안을 했습니다.
- 행이 정당한 사유 없이 업무를 거부하거나, 수행 능력이 현저히 부족함이 객관적 자료 등에 의해 인정되는 경우
또한 아래와 같은 조항 추가를 요청했습니다.
- ‘동’이 합의된 과업 범위를 현저히 초과하는 업무를 요구하고, 조정 요청에 응하지 않는 경우
- ‘행’ 또한 천재지변, 건강상 사유, 기타 불가항력적 사유로 과업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 상호 협의 하에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손해배상 조항도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프리랜서에게 무한 책임은 계약이 아니라 도박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기존)
- ‘행’의 귀책사유로 인해 발생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진다.
(수정 제안)
- 손해배상은 ‘행’의 귀책사유로 인한 직접적이고 통상적인 손해에 한하며, 그 책임 한도는 본 계약의 총 계약금액을 초과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런 조항도 추가했습니다.
- 업무 과정에서 ‘행’이 사용한 강의 자료, 방법론, 템플릿에 대한 저작권은 ‘행’에게 귀속되며, ‘동’은 본 계약 목적에 한해 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
다행히 지인도 해당 계약서가 저에게 불리하다는 점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정안은 모두 수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서명이 망설여졌습니다. 계약서의 문제가 아니라, 프로젝트에 얽힌 의사결정자들과 이해관계자들의 태도가 문제라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소통 방식과 말투 어디에서도 ‘파트너십’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경험상 이런 직감은 잘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인에게 우려되는 포인트를 솔직하게 전달했고, 다행히 지인도 이해해 주었습니다.
또 한 번은 해외 기관과 함께하는 6개월짜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영문 계약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더 꼼꼼함이 필요합니다. 문화 차이로 인해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매한 문장은 번역기를 돌려 확인한 뒤, 의미를 다시 묻고, 명확하게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지급 조건도 수정했습니다. 2개월에 한 번 지급에서 매달 지급으로 요청했습니다. 프로젝트 기간이 긴 만큼, 금전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고 수용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서로를 '갑'과 ‘을’이 아닌 ‘파트너’로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계약서는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패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걸 가릴 처지냐”고요. 저도 압니다. 당장 일이 급할 때가 있다는 걸요. 하지만 여러 해 프리랜서로 일하며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첫 단추가 불편했던 프로젝트는 끝까지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그 직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계약서를 꼼꼼히 쓰는 건 까다로움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계약서 없이 일하지 말고, 불합리하다면 나이스하게 수정 요청을 해야 합니다. 변호사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제는 AI 툴만으로도 충분히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다음에는 누군가가 그 침묵의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No'라고 말하는 것. 비록 오늘 통장에 찍힌 숫자가 작아질지라도, 그게 프리랜서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프로젝트를 선택할 때, 여러분만의 기준이 있다면 나눠주세요. 서로 도우면 좋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