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가 있습니다. 주말이면 자연스럽게 만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나눠 먹는 사이인데요. 하루는 이런 대화를 하게 됐습니다.
“우리 동네에 맛집이 좀 있나?”
“그럼, 우리가 다니면서 한번 기록을 해볼까?”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둘 다 먹는 걸 좋아했고, 그 경험을 흘려보내기 아까웠을 뿐이죠. 어릴 때부터 1년에 열 번 넘는 제사를 지내며 자연스럽게 ‘먹는 자리’에 익숙했던 친구는, 제 눈엔 이미 '동네 맛집 잘알러'였습니다. 여기에 저는 대기업 식품 마케팅을 했던 경험과 일본 우동 출장, 해외에서 맛집을 돌아다녔던 감각이 조금은 보태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아주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다닌 곳을 잊지 않기 위한 아카이빙에 가까웠습니다. 어쩌면 그 기록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또 예상치 못한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프리랜서로서의 직감도 작용했고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공동 인스타그램 계정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자영업자들이 어렵다는 말이 일상이 된 요즘, 숨어 있는 가게를 발견하는 기쁨과 동네 경제에 아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어요. 맛없으면 올리지 말자는 약속과 함께요. 1년이 지나 90개가 넘는 포스팅이 쌓였습니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았어요. 프리랜서에게 중요한 건 ‘성과’보다 ‘지속’이라는 걸,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라구 볼로네제 파스타 (사진 제공: 킨스데이)
어제였어요. 도서관에서 작업을 하다 친구에게 번개콜을 했습니다. 갑자기 라구 볼로네제 파스타가 먹고 싶었거든요. 요즘 춥다고 집에만 있었더니 포스팅도 좀 뜸했고요.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갔던 동네 와인바에서 배가 불러 못 먹었던 메뉴였습니다. 오후 5시, 네이버 예약을 걸고 쿠폰 덕분에 하이볼도 무료로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설렜습니다. 와인바를 향해 걸어가는데 바람은 차가웠지만 하늘은 유난히 맑았습니다. 이런 날엔 괜히 기대가 커지기 마련이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다란 테이블에 사장님 지인으로 보이는 한 분만 앉아 있었습니다. ‘이래서 장사가 잘 될까’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작년에도 그랬고, 오늘도 좌석이 여유로웠거든요. 라구 볼로네제와 보스코 크림 파스타를 주문했어요.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겼습니다. 비주얼은 합격이었죠. 드디어 한 입을 맛봤습니다.
"…오잉, 짜네?"
친구도 동의하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실망했지만 기록할 가치가 없는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이런 순간이 더 솔직한 기록이 될 수 있거든요. 배가 고팠던 탓에 접시는 깨끗하게 비웠지만, 마음 한켠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리가 비어 있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근처 카페로 들어갔습니다. 벨기에산 다크 초콜릿으로 만든 핫초코 라테를 주문했지요. 한 모금을 마셨습니다. 이번엔 웃음이 났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했습니다. 친구도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프리랜서인 제 삶에도 이런 순간이 필요합니다. 노력 대비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아도, ‘잘 만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이 아직 살아 있다는 확인.
벨기에 다크 초콜릿으로 만든 핫초코 라테 (사진 제공 : 킨스데이)
지금까지 제 인생의 핫초코는 단 두 번 맛났는데요. 프랑스 몽펠리에의 어느 부잣집 아주머니가 아침에 직접 녹여주시던 핫초코. 그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뉴질랜드 러셀의 수제 초콜릿 숍에서 아르헨티나 아주머니가 만들어주던 그 한 잔. 춥거나 비 오는 날이면, 그 맛들이 문득 떠오릅니다. 리치하면서도 쌉쌀하고, 달콤하면서도 깊은 맛이요. 원재료에 충실한 평생 잊지 못할 그런 맛이었어요.
생각해 보면, 누군가에게 이런 기억을 남겨주는 일은 외식업에 종사하는 분들만이 가질 수 있는 '파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식구’라는 말을 함께 밥을 먹는 사람에게 쓰는데요. 혼자 먹든, 누군가와 먹든, 그 경험은 결국 기억으로 남습니다. 제 지출 내역을 보면 식도락은 늘 상위권인데요. 그래서 바라봅니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철학을 가진 사장님들이 더 많아지기를. 그래서 저와 친구는 오늘도 기록을 합니다. 광고가 아닌, 내돈내산으로, 동네 경제를 조금이라도 살리고, 숨겨진 보석 같은 가게를 발견하는 일을 공유하고 싶다는 작은 신념을 가지고. 조회수가 적어도 괜찮습니다. 이 기록은, 프리랜서로 살면서 삶의 리듬을 잃지 않기 위해 만든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리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