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이 폭발하고, 친한 동료가 죽습니다. 창작뮤지컬 <비하인더 문>에서 애드는 그 죽음을 “근사한 실수”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희생이 인류의 진보로 이어진다면, 그 실수는 값진 것이라고요.
저는 그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함을 넘어 분노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실수를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니요. 관대함이라기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에서 뭉클함이 밀려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나는 살면서 근사한 실수를 해본 적이 있었을까?
곰곰이 돌아보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습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저는 늘 실수를 피하는 쪽을 선택해 왔습니다. 한국의 정규 교육 과정을 통과하며 몸에 밴 ‘실수 = 실패’라는 공식, 그리고 살벌한 경쟁 속에서 한 번 미끄러지면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 때문이었겠지요.
문제는 신중함이 커질수록 실행력은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이건 프리랜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때 저는, 돌다리를 두들기다 못해 왜 다리를 건너야 하는지부터 설득해야 하는 조직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안정은 유지됐지만 성장은 멈췄고, 결국 유능한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물론 무턱대고 실패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한 실리콘밸리 HR 전문가는 AI 시대의 역량으로 “빠른 판단, 맥락 이해, 그리고 책임”을 꼽았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실수를 대하는 태도'와 '속도'입니다.
근사한 실수는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기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시야, 그 선택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배포,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일하던 시절, 깊이 인상에 남은 리더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는 연말마다 뉴스레터를 통해 스스로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고백했습니다. 한 해는 ‘다양성’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조직의 애뉴얼 서밋 이후, 참석자들에게 감사 카드를 보내는데 미국식 봉투는 끈끈이가 발라져 있어서 침을 묻히면 봉인할 수 있게 되어있더라고요. 딱풀 문화에 익숙한 저는 봉투 작업 대신 주소 쓰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대표는, “이건 당신의 불편이 아니라, 문화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나의 실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더 넓은 문화 감수성을 갖겠다고 공개적으로 다짐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이 조직에서는 실수가 처벌이 아니라 학습의 재료가 된다는 걸. 이것이 '심리적 안전감'의 본질이라는 것도요.
올해 제 만다라트를 다시 보니, ‘근사한 실수’ 항목이 비어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아직도 너무 안전한 선택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직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훗날 돌아봤을 때 “그건 근사한 실수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을 지금 하나쯤 품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