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파스타는 망쳤지만, 하루를 망치진 않았습니다

by 킨스데이

머릿속에 메뉴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배달앱보다
부엌으로 먼저 가게 됩니다.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고,
<흑백요리사>를 보며
‘나도 언젠가는’ 하는 마음은 늘 가지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요리책을 빌려오기도 하고요.
아직 실력보다 의욕이 앞서는 단계입니다.


오늘은 파스타가 먹고 싶었습니다.
오랜만에 앞치마를 두르고
괜히 팔까지 걷어붙였습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양파 반쪽.
파스타 면, 올리브 오일, 갈아둔 마늘,
후추와 허브솔트, 타바스코 소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조합이면
괜찮은 비건 오일 파스타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레시피는 백종원과 류수영 사이 어딘가에서
적당히 타협했습니다.


물을 끓이고 면을 넣었습니다.
알덴테를 좋아합니다.
왠지 그게 더 ‘제대로 사는 느낌’이 나서요.


팬에 이탈리아 여행에서 사 온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마늘을 약불에 볶았습니다.
마늘이 타지 않게 지켜보는 그 몇 초가
괜히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양파를 넣고 볶았습니다.
표고버섯이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아쉬워졌습니다.
요리는 늘 냉장고 사정에 따라 결정됩니다.


면을 넣고
후추와 이탈리아에서 사 온
이름 모를 ‘매콤한 마법의 가루’를 톡톡.
핫소스도 살짝.


예쁜 접시에 담아
포크로 파스타 면을 둘둘 말아
입에 넣었습니다.


뭔가 이상했습니다.

양파가 달지 않고
쌉쌀하게 매웠습니다.

어우, 도저히 못 먹겠네.

파스타는 웬만해선 실패가 없는데
이번엔 더 이상 삼키기 힘들었습니다.


양파만 덜어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면만 먹으니

1인분이 채 안 되는 양이라

배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문제는 레시피가 아니라
기다리지 못한 제 성격이라는 걸요.


프리랜서에게
실험 정신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기다리는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양파가 익을 때까지,
일이 무르익을 때까지,
상대의 답이 올 때까지.


실패는 할 수 있지만
조급함은
되풀이하지 말아야겠죠.


저녁에 엄마가
제가 덜어둔 양파로
감자볶음을 만드셨습니다.
그제야 양파는 달아졌고
감자와 잘 어울렸습니다.


"아,
때가 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비건 파스타는 망쳤고,
여전히 배는 고팠지만

적어도 오늘은

또 하나를 배웠습니다.


불 앞에서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


프리랜서의 하루도
마찬가지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