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건축가, 시간의 '집'을 선물하다
그 땅에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이의
삶과 융합한 집을 짓는 것이 제 꿈이고 철학입니다.
제주도 여행 중 우연히 방주교회를 다녀온 이후 이타미 준 건축가를 검색하다가 그의 건축이야기를 다룬 <이타미 준의 바다> 다큐멘터리를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말하는 건축가> <안도 타타오>를 이어 한국 건축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 다수 영화제 초청 및 전주국제영화제 수상의 아트 영화입니다.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와 조금은 다른 느낌의 연출이지만(건축가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과 함께 부분적으로 재연 배우가 건축가를 연기합니다.) 음악과 영상미가 뛰어나고 그의 건축물을 제주도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흥미롭게 감상하였습니다.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1937년~2011년.
귀화를 거부하던 이타미 준(유동룡)은 성씨인 유(庾)는 일본에선 쓰이지 않는 한자라 본명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애 최초로 이용한 공항이자, 한국을 올 때 이용했던 이타미(伊丹) 공항의 이름과 깊은 교분이 있던 작곡가 길옥윤(吉屋潤)의 마지막 글자 윤(潤, 일본어 발음 준)에서 이름을 따와 '이타미 준'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이타미 준으로 일본에서는 유동룡으로 불리는 경계인으로의 삶이 그의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건축의 소재로 사용할 흙은 공간에 대한 실마리로 존재하고 시간의 두께인 동시에 지역성에 뿌리내린 내 사상이기도 하다.
오늘날 현대 미술과 건축은 서향 지향적으로 되었지만 이타미 준은 여행과 동양 사상을 통해 어느 시기에 그런 거울을 깨버렸습니다. 그는 예술과 건축에서 중요한 것이 그 지역성의 문맥과 뿌리를 찾아내서 그것을 통해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하였고, 산의 능선이나 민가의 지붕 하나도 그런 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대표작
온양 미술관, 먹의 집, 포도호텔, 수풍석 미술관, 두손 미술관, 방주교회
폭이 고작 몇 미터인 매우 좁고 긴 건물로 내부가 온통 검은색이어서 '먹의 집'으로 불리었습니다. 마치 드로잉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공간은 긴장감이 흐릅니다. 이타미 준은 그곳에 갈 때 색깔 있는 옷을 입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새까맣고 어두운 공간이었으며 주변에 색을 띤 물건이 없었습니다. 당시 매우 흥미로운 주택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다른 건축과 비교해서 굉장히 다른 공기가 흐르는 특별한 감성을 지닌 건축물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작가 안에는 이방인으로서의 큰 어둠을 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경주에서 매우 유명한 건축물인 경주타워입니다. 2004년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공모전에 이타미 준이 창조종합 건축사무소와 공동으로 제출한 설계안을 조직위원회 측이 도용하여 지으면서 저작권법 소송이 있었던 건축물입니다. 설계안 당사자인 이타미 준은 대법원의 판결이 있기 한 달 전 2011년 6월, 74세 나이로 숨을 거두어, 승소 판결을 지켜보지 못하였습니다.
이타미 준 건축가는 클라이언트 김홍주 회장의 첫인상과 언어 표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담기다', '잠재하다', '해방', '열다', '닫다', '혼재하다' 이런 것들을 이미지로 그리면서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배치하기 위해 신경 썼습니다. 마을의 본질 민가의 모티브를 떠올리며 자연발생적인 것을 축으로 삼았고 자연발생적인 포도에 빗대어 소싱을 시작하였습니다. 옛날의 제주도 민가 지붕의 모습을 적용하여 포도호텔의 공간에서는 제주도 옛 마을의 경관을 연상시켜줍니다. 이타미 준은 주변 경관을 정확히 파악하고 경관을 건축물과 가장 잘 연결하는 능력이 뛰어난 건축가였습니다.
수(水)·풍(風)·석(石) 미술관은 22만 평 드넓은 대지 위에 조성된 주택단지 내에 물·바람·돌을 각각의 테마로 삼고 있는 뮤지엄입니다.
수 미술관
제주도의 상징인 물을 주제로 건축한 미술관이며 하늘의 움직임에 물의 반사가 달라지면서 자연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풍 미술관
바람을 주제로 하였으며 돌 오브제에 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치유의 공간입니다. 나무판 틈새로 바람이 통과하면 다양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석 미술관
미술관 앞에 손 모양의 돌조각을 올려놓아 멀리 보이는 산방산과 대비되어 리듬감 있는 명상을 가능하게 하는 곳입니다. 돌을 부각하기 위해 처음 황금색 철판으로 지었으나 오랜 기간 부식되어 지금은 짙은 갈색으로 변하였지만, 건축가가 본인의 철학을 담은 의도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이타미 준의 딸 유이화 소장(ITM 건축사무소)은 이타미 준이 평소 자주 건축을 사람에 비유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세월이 지날수록 중후함이 느껴지듯 그런 건축을 해야 하며, 결국은 건축도 사람처럼 폐허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숙명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타미 준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 장소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중요시하였습니다. 수풍석 미술관을 보면 좋은 자연과 좋은 환경에서 무덤덤하게 느껴질 만큼 매우 심플하게 존재합니다. 건축가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주변과 어우러지는 것에 깊게 고민한 것으로 보입니다.
멀리 산방산을 향하고 있는 두손미술관은 기도하는 손의 형상으로 표현하였으며 석 미술관과 절묘하게 대비되는 곳에 있습니다. 실제 미술관은 지하를 이용하여 공간을 배치하였으며 네거티브한 공간에 유입되는 빛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현재는 개방되어 있지 않고 외관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된 계기가 바로 방주교회였는데요.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하늘이 맑은 날씨에 보았던 교회의 첫 모습은 반짝이는 물과 지붕이 어우러져 매우 인상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화려한 지붕 디자인을 가졌음에도 건물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구름과 주변 자연까지도 함께 눈에 들어오는 매력적인 건축물이었습니다.
설계과정에서는 많은 시련과 변경사항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가장 많은 수정이 있었던 건축물이 바로 방주교회라고 합니다. 이타미 준은 완벽한 하늘의 표정과 빛과 구름의 흐름을 완벽하게 담기 위해 마지막 완성까지 고민하였습니다.
한국 국적을 유지했던 이타미 준 건축가는 한국에서는 재일교포로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그 어느 곳에 속하지 못한 삶 속에서 큰 어둠을 안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건축물에는 깊은 어둠과 절대 고독이 표출되어 있지만, 그 공간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빛과 자연의 어울림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의 공간이 됩니다. 이타미 준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조국에 대한 생각과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일하는 현실, 그 큰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자리매김할지 계속 고민하였고, 제주도 프로젝트에 이르러 갑자기 어둠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내면의 어둠을 뛰어넘었다고 말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연을 품은 그 만의 건축 철학은 자연이 아름다운 제주도와 매우 가깝고 친밀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많은 분의 힐링 여행지 제주도에서 이타미 준 작가의 건축물을 직접 마주한다면 더욱 큰 여행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지] <이타미 준의 바다> 영화 스틸컷
[참고 글] 위키백과 https://namu.wiki/
[참고 글] 수풍석 뮤지엄 사이트 https://waterwindstonemuseu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