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듣는 엄마가 아닌 더 '잘' 보는 엄마로 성장하기
내가 몸으로, 마음으로 가장 먼저 알았던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누구도 ‘외로움’의 기준과 느낌이 무엇인가에 대해 잘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겠다.
외로움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생각해봤을 때, 대부분이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결핍’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다니던 길에서 문득 ‘혼자’ 걸었을 때, 약속을 잡았는데 갑자기 오지 못한 이유로 혼자 식당에서 먹을 때처럼 ‘함께’가 아닌 ‘혼자’였을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늘 외로운 존재라고 한다. 함께 있어도, 혼자 있어도 마찬가지라고 우연히 본 책에서 이야기한다.
‘소리’의 ‘결핍’에서 찾아온 ‘외로움’은 곧 소통의 사각지대에 나를 이끌었다. 거기서 오랫동안 내면을 끝없이 다듬어야 했다.
가족이 쓰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 소통하기 위해 애썼음에도 채워지지 않던 ‘외로움’이었다.
삼십여 년 내내 쉬 채워지지 않던 외로움은 두 번째 언어인 ‘수어’를 배우면서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주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음에도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처럼 외로움을 배웠던 사람을 만나 사랑했고 결혼했다.
결혼하면서 어느 날 선물처럼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나처럼 같기도 하면서 다른 ‘외로움’을 겪어야 하는 또 다른 문제 앞에서 불현듯 잊고 살았던 그때의 외로움이 생각났다.
평소와 다름없이 식사 시간에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남편이 밖에서 있었던 일을 ‘수어’로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던 내 시선은 남편의 얼굴로 향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혼자서 보고 있어야 했다.
남편의 이야기와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느라고 바빴던 와중에 아이의 마음이 넌지시 느껴졌다.
“이제 막 세상의 소리에 신기함을 감출 수 없는 아이는 소리의 결핍에서 성장한
부모 가운데 조금씩 외로움을 알아 가겠구나.”
미안함이 물들었는지 아이는 엄마의 눈빛을 읽으며 맛있게 밥을 먹는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의 내 모습을 되돌아봤다. 음성언어로 말하며 밥을 먹던 가족들 사이에서 묵묵히 밥을 먹기만 했던 내 모습이 지금 눈앞에 있는 아들 예준이의 모습과 오버랩됐다.
남편에게도 외로움을 주고 싶지 않아, 손은 아이의 입에 갖다 대는 밥이 맛있기를 바랐고, 눈은 남편의 이야기를 향했다.
‘엄마는 늘 쉼 없이 바쁜 이유가 이런 것일까’ 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늘 외롭다. 엄마만이 온전히 느끼는 감정과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느끼지 않으면 모르기에.
그래도 내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외롭지 않아서 좋았음에도 아들 예준이 혼자 부모의 언어가 다르다고 하여 외로움이 너무 크게 와 닿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