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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샛별 Jun 01. 2020

#3. 노래방에서

‘못’ 듣는 사람이 아닌 더 ‘잘’ 보는 엄마로 성장하기

‘농인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못 부를 것이다?’


단순히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편견이겠지만 잔존 청력이 있거나 음정과 박자를 구분할 수 있는 청각장애인들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 익숙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노래방에 자주 갔다. ‘뽀뽀뽀’에 이어 노래방에 있는 동요를 다 섭렵하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른 채 음정과 박자 모두 무시한 채 신나게 불렀다. 지금에서야 다시 그때의 내 모습을 그려봤는데 아빠의 시선에서 말하는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우리 둘이 있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네가 자유롭게 외칠 수 있다면 아빠는 충분하단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방에 가는 걸 좋아했던 이유가 뭐였는지를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는데 ‘소리’를 대신 ‘진동’으로 느낄 수 있어서, 다른 방법으로도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 한다.     


‘노래방’을 생각하니까 잊었던 추억의 한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새 학기 즈음이었다.

그때 어렸을 때 잠깐 만나 놀았던 친구가 마침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런데 어릴 때의 그 친근한 느낌은 사라지고, 일명 ‘일진’이 되어버린 그 친구에게 거리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여전히 나를 ‘동네 친구’로 생각하며 은근히 잘 챙겨 줬다. 어느 날 수업이 모두 끝난 후 집에 가려던 길이었다. 교문 앞에서 마주친 그 친구는 나를 부르더니 노래방에 같이 가보자고 말하던 그 친구의 눈빛에 이끌린 순간, 나는 어느새 노래방이 있는 시내에 와버렸다. 그 친구 한 명만 아닌 어울리던 친구들도 내 어깨를 부여잡은 채 걸어갔다.

늘 집과 학교를 오가는 같은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이 생겨버린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그 친구들에게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을까. 이 ‘두려움’의 정체를 생각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노래방에 들어가자마자 아빠의 손을 잡고 왔던 그 노래방의 분위기가 아닌, 어두컴컴했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던 새로운 분위기의 노래방이었다.

친구들이 노래를 차례대로 부르고 있었다.

god의 ‘거짓말’ 노래를 눈으로 읽던 중에 이 가사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나를 잊어줘 잊고 살아가 줘
나를 잊으면 안 돼
나는 그래 나는 괜찮아 아프잖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떠나가

나는 눈으로 보는 친구들의 노래 가운데 이런 걱정을 해야 했다.


“집에 늘 일정한 시간대로 도착하던 내가 오늘따라 늦는 걸 알면 엄마는 걱정하실 텐데...”


걱정에 사로잡힌 내 눈 앞에 마이크가 나타났다.


“너도 불러 봐. 너도 말은 하잖아.”

“나.. 그래도 잘은 못 부르는데...”

“아이, 그냥 우리 신경 쓰지 말고 불러 봐.”


어쩔 수 없이 받아 든 마이크 앞에서 나는 친구들의 시선에 서 자유롭지 못한 채 노래를 시작했다.

이정의 ‘나를 봐.’
잘 봐.
내 모습이 어떤지.
네가 하라는 대로 했어.
근데 넌 지금 어디서 나를 바라보는 거야.


그렇게 ‘마이웨이’로 부르며 마이크를 내려두는 순간,

친구들은 하나같이 환호성을 불렀다.


“저 봐봐. 100점이다! 100점!!”

얼떨결에 ‘100점’을 받은 채 자리에 앉았던 나에게 문득 스쳐간 생각이 있었다.

“아참, 전화해야 하는데...”

한참 노래에 푹 빠진 친구들에게 전화를 대신해달라고 말하는 데에 망설이다가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그렇게 친구들과 헤어진 후에 집으로 가는 길은 평소보다 해가 져서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순간, 엄마 아빠의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어쩌다 늦은 거야? 걱정했잖아!...”

“그냥... 친구들끼리 놀고 왔어. 전화했어야 했는데 못했어.”


전화를 하지 못하는 불편함은 이내 서로에게 걱정을 안겨 주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안도의 눈빛을 본 채 가방을 던지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그러고는 친구들을 보며 느꼈던 마음이 혼잣말로 나온다.

“너희들이 한다는 일탈, 나는 못하겠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하굣길의 일탈은 그렇게 끝났다.


“샛별아, 나하고 여기 갈래?”

“아니, 나 집으로 바로 가야 해서... 미안, 다음에 갈게.”


그 친구는 내 마음을 짐짓 알았는지 더 이상 권유도 하지 않았다.


일진이 되어 버린 동네 친구와의 인연도 그렇게 끝나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 덕분에 사람들 앞에서도 노래를 불러 보는 경험을 선물 받았다. 나는 꼭 학교 규칙을 따르지 않은 채 자신의 개성대로 보내려는 일진이 나쁜 건 아니지만, 나는 그저 평범하게, 나쁜 길으로 가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부모님의 눈빛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에 부응하고 싶었다.


잠시 일탈을 해 보는 것도 좋다. 너무 바른 길만 걸어가면 만나게 되는 위험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모를 수 있기에.


전에 만나 뵈었던 어른이 이야기해 주셨던 내용 중에서,

“예준이는 너무 엄마 품 안에서만 사랑하는 것보다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방법도 알게끔 풀어두는 것이 좋아요.”


엄마가 된 나는, 예준이가 가끔 일탈을 했을 때... 물론 위험한 일탈은 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막상 하게 됐을 때 느끼는 것이 정말 많다.


“예준아, 가끔은 다른 길도 걸어 봐도 괜찮아. 그 길을 걷고 나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날 수 있거든. 그래도 하고 나서 후회는 하지 않도록 한번 더 생각해 보고 걸어가기를 바라.”


그때의 엄마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시작을 선물 받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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