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술 주도 산업과 그래픽디자인
디자인은 인간이 삶을 영유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사물과의 접점을 계획하고 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축, 의상, 가구, 식기, 전자제품, 인쇄물, 유저인터페이스(User Interface)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창조하는 디자인은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역사, 문화, 철학과 같은 인문학적 요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디자인의 대상이 해당 문명에 속하는 모든 사물이라는 전제를 두었을 때 한국의 현대 디자인은 특수성을 지니게 된다.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조건에서의 역사를 지닌 문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되는 사회상을 반영하여 디자인의 철학이나 기술 혹은 스타일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나 한국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군사 독재정권에 의한 군정시대 등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역사의 시기를 거치게 되면서 모든 문화적 요소가 단절된 채 현대 디자인이 도입된 것이다. 이렇게 도입된 디자인은 전통 공예나 예술 혹은 민족의 철학과는 전혀 상관없이 서양에서 발전된 기술 혹은 스타일로서 한국에 정착하게 되는데, 전쟁의 폐허에서 재건을 위해 부지런히 발전을 거듭하던 대한민국의 역사와 맞물려 산업을 발전시키고 매출을 증대시키는데 일조를 하는 산업화의 첨병으로써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암울한 역사 속에 등장한 현대 디자인의 특수한 배경으로 인해 한국 현대 그래픽디자인의 특징 중 가장 큰 요소가 '대기업과 수출 주도적 산업의 그래픽디자인'이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폭 넓게 나타나는데, 이는 외화벌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정부 주도의 수출 정책이 대한민국 산업을 이끌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업 기조와 맞물려 한국 현대 그래픽디자인 역사에서 나타났던 세부 특징은 다음과 같다.
1980년대 한국의 가장 큰 목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만한 기술력을 확보하여 제품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70년대까지는 저렴한 노동력을 통해 세계 시장에 저가형 제품을 생산 및 수출하는 정책으로 효과를 보았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중국에 의해 점차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높은 기술력과 품질로 무장한 제품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국가적인 정책이 선회하였고, 마케팅과 디자인도 동일한 트렌드에 맞게 제품의 첨단 기술력을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발행된 월간《디자인》을 통해 소개된 전자제품 생산 기업의 광고 <그림 1, 2, 3>에서는 이와 같은 디자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메이저 3사였던 삼성과 금성, 그리고 대우전자의 광고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한 기업의 광고를 보는 것처럼 스타일과 주제가 동일하다. 우주를 상징하는 배경에 광택이 나는 금속성 안드로이드 혹은 무지개 색상의 아우라가 있는 인간 형상 등은 ‘인간과 기술의 만남’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당시 주류를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트렌드는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산업의 광고에도 종종 등장한다.
같은 기간인 89년도 9월에 소개된 프로스펙스의 운동화 광고<그림 6>를 보면 <그림 1, 2, 3>과 동일한 스타일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며, 89년 5월에 개제된 해태의 광고<그림 7> 역시 식음료를 주요 분야로 사업하는 기업의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은 다르지만 첨단 기술을 표현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 수상작 역시 대기업의 첨단 기술을 과시하는 스타일의 그래픽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6년 한국방송공사사장상을 수상한 변추석의 금성전자 콤팩트 오디오디스크 광고 디자인도 우주를 연상케 하는 배경과 무지개빛 금속성 반사광을 내는 레이저 디스크 이미지를 통해 당시 첨단 기술력의 상징인 레이저 디스크를 표현하였다. 시기적으로 10년 정도 지난 후인 1994년에 출품되어 상공부장관상을 수상한 박금준, 이정혜의 삼성전자 해외 홍보 포스터 역시 시대 흐름에 따라 디자인 스타일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래픽 속에 등장하는 오브제를 통해 기술력을 과시하는 디자인 기조를 유지했음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주, 로보트, 기계와 화려하게 빛나는 광선들은 품질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야 했던 대기업 중심의 수출 정책에서 필수적인 디자인 전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당시 한국 디자인 스타일을 주도하는 근본 요인이 경제적인 필요성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세계적인 디자인 경향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1970년대에서 80년대 중반에 주목을 받았던 디자인 경향 중 하나인 하이테크 디자인은 기술 진보로 인해 새롭게 사용되기 시작한 유리, 벽돌, 금속, 플라스틱 등 산업용 신소재를 외부로 돌출시켜 새로운 미학을 창출시키는 경향이었다. 리처드 로저스와 렌조 피아노의 파리 퐁비두 센터<그림 8>로 대변되는 하이테크 디자인은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필요와 맞물려 적절히 그래픽디자인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일러스트레이션 드로잉 기술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던 에어브러시의 효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80년대 당시에는 일러스트레이션에 컴퓨터 그래픽이 아직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수작업으로 그려야 했는데, 하이테크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필요한 금속성 반사광이나 그라데이션 같은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에어브러시가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트렌드는 당시 발행된 월간《디자인》에서 에어브러시 광고가 자주 등장했던 점과, 80년대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 수상작들의 아트웍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