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둘다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최종 합격’. 살면서 이 단어에 흥분할 일이 얼마나 될까? 나에게는 수능 이후 치렀던 대학 실기시험 이후 학교에서 발표하는 최종 합격, 입사 지원한 회사에서 공지하는 최종 합격. 그리고 이번 교과서 디자인 작업을 하며 교육청에서 고지한 최종 합격이 있다. 이 네 글자에 이렇게나 흥분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나에게 간절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붙들고 있었던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디자인 작업이 끝났다. 물론 한 달간의 온라인 전시 기간을 거쳐 최종 부수를 확인한 후, 올 가을(11월)에 진짜 인쇄 데이터를 넘기고 나야 정말로 끝이지만, 일단은 한시름 놓은 셈이다. 현재 각 교과서 출판사 홈페이지에는 최종 합격한 과목별 교과서를 온라인에 전시 중이다. 현직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출판사별 교과서 전시본을 보고 2025학년도에 가르칠 교과서 출판사를 결정하는, 선생님들에겐 결정의 시간이고 출판사들에겐 조마조마한 기다림의 시간이다.
큰 출판사와의 작업을 마친 일러스트 작가분들의 교과서 작업 포트폴리오가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규모 면에서도 커리어 면에서도 굉장한 홍보가 될만한 일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본문 디자인을 작업한 나로서는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아직 진짜 ‘최종’은 아닌 셈이라 정식으로(?)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홍보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은 괜히 조심스러운 마음. 대신 이렇게 약 2년여간의 대장정을 글로 회고하며 이 교과서 작업이 내게 얼마나 의미가 있었는지를 정리해 본다.
지금의 대표님과 나는 2020년, 어린이 동화책 저자이자 본문 담당 디자이너로 처음 만났다. 여전히 외주 프리랜서였던 나는 그저 해당 출판사 대표님과의 미팅에 동행했을 뿐인데, 그 인상이 각인되었는지 나중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꼭 함께하고 싶다며 인사를 건넸다. 그때 이야기한 ‘다른 일’이라는 게 바로 교과서 디자인이었다. 2025년 교육개정 교과서 디자인 작업은 3년 뒤에나 진행할 일이라, 그야말로 너무 까마득한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솔직히 ‘내가?’ ‘할 수나 있을까?’ ‘너무 먼 일인데?’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 당시에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과목 1등 아니면 시작할 생각도 없었다는 말로 나에게 교과서 디자인을 의뢰하던 대표님의 눈빛이 선명히 기억난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던 눈빛과 포부는 그 당시 나로 하여금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저 당찬 포부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교과서 디자인을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기회가 되는 일이라면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교과서 디자인 경험이 없는 내가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고민이었지만(경험해 본 바 ‘교과서 디자인’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디자인 프로세스와 조금 다름을 느꼈다), 사실 나에게는 더 현실적인 큰 고민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 출퇴근을 해야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게 따라 그동안 해오던 기존의 디자인 일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
회사도 그렇겠지만, 프리랜서에게 ‘거절’은 거의 ‘끝’이나 다름없다. 내가 아무리 클라이언트와 수 년째 관계를 유지하며 일을 해오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고객님, 제가 이번에 장기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서요. 1년 뒤부터 일을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을 한다고 ‘아이코 그렇군요! 그럼 1년 뒤에 뵙죠’ 하고 1년을 기다렸다가 나를 다시 찾아올 클라이언트가 과연 있을까?
오래 보는 책 중 하나인
교과서 판권에
내 이름이 들어간다면…
한편으로는 교과서 업계 쪽에 발을 잘만 들이면, 꽤 오래도록 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회로를 돌려보기도 했다. 그래서 정식으로 교과서 디자인 의뢰가 들어왔을 때 이를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이는 프리랜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제안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것만 잘 되면, 분명 커리어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교과서 프로젝트를 위해 그동안 프리랜서로 해왔던 다른 프로젝트들을 잠시 내려놓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접하는 분야를 위해 다른 모든 걸 내려놓기엔 아무래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클라이언트 측에서도 나를 배려해(?) 내가 하고 있는 기존의 디자인 일들(단행본, 간행물, 홍보물을 비롯한 각종 외주 작업)을 하면서 이 교과서 작업도 할 수 있도록 출퇴근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방안을 제안해 주었다. 그렇게 2022년 가을, ‘교과서 판을 흔들어 보자’는 당찬 포부와 함께 나는 이 장기 프로젝트 계약서에 날인을 했다.
‘교과서’라는 단어에서부터 오는 중압감과 부담감은 실로 엄청났다. 그동안 해왔던 여러 디자인 분야 중 그 어느 때보다 나를 긴장시켰다. 학원 교재, 단행본 등의 교재 등이 아닌, 정규 교육을 위한 교재로써의 교과서라는 게 괜히 부담스러웠다. 그냥 디자인만 하면 되지 뭐!라고 하기엔 왠지 모를 사명감이 올라오는 듯했다.
요즘 교과서는 예전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르긴 하다. 겨우 2도, 내지는 특별 페이지만 4도에 머물렀던 옛날 교과서 세대인 나로서는 눈이 휘둥그레 해지는 일이다. 그만큼 디자인의 필요 역량도 많이 올라왔다는 이야기인데… 하지만 정작 작업을 하는 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는 한편으로 여전히 굉장히 보수적인 작업임을 느꼈다. 삽화로 들어가는 학생의 성비가 쪽수별로 일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거나, 예시로 든 그림 요소 역시 개수의 차별을 두어선 안된다거나 하는. 단순히 디자인적 요소로 넣는 그래픽 하나에도 ‘교과서에 이래도 될까?’ 하는 생각을 놓칠 수 없었다.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교과서 작업 프로세스였는데, 이미 해놓은 전체 판면을 싹 갈아엎고 새로 구성을 해야 하거나 제출 마지막까지 말도 안 되는 더미 원고로 디자인을 이어가야 하는 과정은 좀처럼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완성일 리도 없는 상태의 작업을 ‘1차 심사 기간에는 제출해도 된다’는 말에 ‘아직 진행 중인 미완성’ 상태 그대로를 책으로 제작해 제출하는 상황은 정말이지… 숱한 종류의 작업을 해왔다고 자부하지만, 특히 이 프로세스는 디자이너로서 정말 힘들었다.
교과서는 원래 이런가?
이런 생각들이 끝도 없이 계속될 때마다 나는 ‘그래, 디자인이 뭔지 보여주겠어’, ‘디테일의 끝을 보여준다’ 등 평소라면 꺼내지도 않을 말들을 스스로에게 외쳐나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멘탈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디자인’이라는 큰 틀에선 같지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해왔던 디자인 프로세스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에 최대한 무너지지 않도록 흔들리는 멘탈을 잡고 또 잡았다.
심사 제출일이 다가올 때마다는 거의 매일,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대표님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오롯이 업무 연락만을 위해 걸기 시작했던 전화통화는 자연스레 안부 인사에서부터 오늘 저녁 메뉴는 무엇인지 서로 정해주기(?)까지 하는 너스레로 이어졌다. 그때만큼은 고용주와 고용인이 아닌, 이 교과서를 처음으로 발맞춰 함께 만들어나가는 동료였다. 대표님의 노고를 알고, 나의 노고를 대표님이 알고. 우리는 진심으로 이 교과서가 잘 완성되길 바라고 또 바랐다.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굉장한 경험이 되었다. 절대적으로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이 중요한 프리랜서에게 사실 이런 경험을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단발성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얻을 기회 자체가 프리랜서에게는 굉장히 적은 편이다. 장기적 소통을 통해 클라이언트를, 그리고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게 서로 소통하고 공유하며 훈련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굉장한 ‘뜻밖의 소득’이었다.
교과서 디자인을 하는 1년이 넘는 시간은 그동안 해왔던 ‘단순히 디자인 완성을 위한 확인 개념의 건조한 기존의 소통 방식’을 넘어서는 과정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디자인이라는 매개로 클라이언트와 내가 진심으로 하나 되고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설득해 나가는 소통 방식’을 알아가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교과서 디자인은 내게 그저 비중 있는 하나의 작업을 넘어선, 태도의 훈련을 통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단행본과 같은 판면의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잡지의 자유로운 레이아웃 방식처럼 다양성을 보여주는, 그러면서도 때로는 아기자기함과 과감함을, 일관적이면서도 다양한 컬러 배열, 사소한 아이콘 디테일, 삽화와 컷도안과의 조화로움, 인포그래픽 요소로 내용을 요약하고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능력, 흐름에 따라 적재적소에 디자인 요소를 배치하는 일… 무엇보다 이 모든 상황에서 ‘프리랜서로서’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잘 반영해 그들을 만족시키면서도 끊임없이 제안하고 설득해 더 나은 디자인을 완성해 나가는 일. 교과서 디자인 작업 안에 그동안 해온 모든 매체에서의 경험이 모두 들어있다.
교과서는 정말 어려운 분야다. 겨우 한 번 경험하고 내뱉는 말이라니 우습긴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동안 해왔던 모든 디자인의 경험을 쏟아내야 했던 작업이었다. 우선 만들면 끝이 아니라, ‘합격/불합격’의 체제가 있는 것만으로도 냉정하고 치열한 세계임에 틀림없다. “교과서 디자인 하면 모든 디자인은 다 한 거나 다름없다”는 교과서 업계에 떠돈다는 그 말은 어쩌면, 극한의 치열함 속에서 버텨내기 위해 몸부린 친 생존의 증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교과서 역시 분명 하나의 ‘상품’이긴 하지만 ‘교육’이라는 타이틀 아래 괜스레 사명감까지 절로 갖게 되고야 마는 작업. 교과서는 분명 디자이너라면 도전해 볼 만한 가치 있는 작업이다.
무엇보다 이 년여간의 기나긴 여정 동안 교과서 디자인은 나에게 디자이너로서, 프리랜서로서 한 단계 성장해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바라기는 이번에 작업한 교과서가 과목 순위에도 잘 들어서 많이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 언젠가 다음 교육개정 교과서 작업을 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오고, 그래서 나에게 또다시 그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도 지금 마음 그대로 가치 있는 일에 진심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함께할 날을 그려본다.
처음 맡게된 큰 프로젝트를 잘 마치면, 다음에도 큰 프로젝트가 자연스럽게 들어올 거라 믿었던 지난 2022년 가을을 지나, 어느새 2년이 흘러 두 번째 가을을 맞는다. 비록 이에 버금가는 큰 프로젝트는 아직 접하지 못했지만, 기나긴 시간동안 얻어낸 값진 경험을 밑거름 삼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른 일들을 끊임없이 해나갈 것이다. 조금 덜 알아주더라도, 속상해하거나 주눅 들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내가 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여전히 변함없이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는 나는, 프리랜서이자 디자이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