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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Aug 02. 2019

안 좋은 일들은 한 번에 몰려온다

처음부터 ‘아이 없는 삶’을 살기로 한 건 아니었다


1층 같은 1층 아닌

반지하 같은 신혼집


첫 신혼집의 인상은 굉장(?)했다. 분명 한참 계단을 올라가야 있었지만 반지하 같은, 1층이지만 지하 같기도 한 독특한 위치와 구조의 전셋집이었다. 가파른 30여 개의 계단을 오르고 하나의 커다란 대문을 넘어 긴 복도를 지나가면 그 끝에 나타나는 집. 채광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데다가 전체적으로 집안보다 높은 위치(?)에 화장실이 있는, 아주 오래된 주택의 1층 집이었다.

양가의 도움 없이(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無의 상태에서 신혼살림을 꾸려가는 건, 마치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아이템을 하나둘 씩 획득해가는 것 같았다. 마치 아이템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레벨업을 하는 듯 한 느낌? ‘아무것도 없는’ 캐릭터 역할의 우리 둘이었지만, 오히려 수많은 레벨업의 기회(?)—어쩌면 극한의 상황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우리 둘 뿐이었기 때문일 수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는 채워나가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대부분 가성비 좋은 이케아 가구들로 신혼집을 채워나갔고, 값이 비싼 가전제품들은 월급을 탈 때마다 하나씩 채워갔다. 물론 할부로(할부 만세!). 자취방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전자레인지를 가장 먼저 구입했고 무슨 이유였는지 전기밥솥은 무려 거대한 10인용짜리를 구매했다. (나중에는 이 덕에 미리 많은 밥을 한꺼번에 해두고 냉동실에 얼려놓는 생활의 지혜(?)를 얻었다.)  

결혼 후 조금 지나서야 겨우 구매한 양문형 냉장고는 애매한 대문 크기 때문에 끝내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배송 오던 날 다시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황당한 일도 그냥 웃어넘겨야 했다. 결혼하면서 유일하게 지인에게서 받은 선물은 다름 아닌 세탁기. 하지만 사주시는 분의 큰 뜻(백색가전은 L사라는 남편의 취향과 반대되는, 그분은 S사 마니아였다)을 거스르지 못해 원치 않는 걸 얻게 되었다. S사, 심지어 새빨간!! 통돌이 세탁기였다. 물론 우리에겐 엄청난 선물이었지만.



안 좋은 일들은

한 번에 몰려온다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다는 건 인생에 있어 대단한 변화의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결혼으로 하나가 된다는 건, 둘에게 있어 분명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특별하고 좋은 일 중에 하나가 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분명 인생에 있어 큰 변화가 되는 사건(?)이니까. 갈수록 점점 결혼을 안 하거나 늦추는 시대가 되고 있지만, 그때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나는 주위에서 결혼을 일찍 하는 몇몇 중의 한 명이었다.


여러 가지로 불안정했던 시기에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한 2012년은 나에게 있어 변화의 분기점이 될 만큼 분명 특별하고 대단히 소중한 해였다. 그럼에도 때로는 안 좋은 일들이 한 번에 몰려오기도 했다. 정말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생계(?)를 위협하는, ‘월급’이라는 단어로 소속감을 주는 곳, 회사 복이 지지리도 없던 해가 바로 그해였다.

첫 번째, 월급 '떼임' 사건.
결혼 하기 바로 전에 회사를 한번 옮겼었다. 제법 규모 있는 출판사라는 안정적인 회사를 두고, 나는 지인의 추천 및 권유로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신생 회사였지만 그만큼 새로웠고 도전적이었다.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서 무너졌다. 회사가 망해버렸다. 지금 냉정하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회사는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풋풋했던(?)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월급 3개월치와 그 회사에 있는 동안의 4대 보험 중 하나인 국민연금 금액 6개월치가 고스란히 밀렸다. 노동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기간도 지나버려 민사소송까지 신청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때 받지 못한 월급은 여전히..(말잇못)


+번외+
결혼 후 다녔던 첫 회사에 있는 동안, 갑자기 월급통장이 압류된 적이 있었다. 내가 미성년자이고 부모 아래 있던 그 시절부터 수년간 밀려있던 건강보험료 장기 체납, 그로 인한 주거래 계좌 압류 통보였다. 소득은 진작부터 있었는데 왜 하필 그때 통보가 내려진 걸까. 월급도 안 나오는데 압류까지 되고 정말이지 아주 가관이었다. 200만 원이 넘는 금액을 갑자기 내야 했던 우리는 급한 대로 현금서비스를 받고 나서야 압류를 풀었다. 와- 쓰고 보니 진짜 엄청나네.


두 번째, 월급 '밀림' 사건.
이미 한 사람 치 월급만으로 몇 달을 생활하고 있었기에 가만히 놀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논 건 아니었다. 하루라도 뭘 하지 않으면 세상 불안해하는 나는야 프로걱정러니까. 한 달 정도의 구직활동 후 나는 곧 다른 회사를 들어갔다. 두 번째 회사는 제품 회사의 홍보 디자이너. ‘홍보’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대부분의 모든 디자인을 혼자 맡았다. 덕분에 디자이너로서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패키지부터 웹, 로고, 배너, 광고까지 다양한 분야를 거기서 다 경험했다.

하지만 역시나 안타깝게도, 회사 운영이 잘못된 것인지 다니기 5개월이 지났을 무렵부터 제 날짜에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런 시련이ㅠㅠ) 전 회사에서의 타격이 없었더라면 그냥 좀 더 버텨봤을지도 모를 회사였다. 안 좋게 말하면 디자이너가 별걸 다 해야 했지만, 좋게 말하면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곳이었던 곳이니까. 퇴사를 이야기하는 나에게 ‘밀리긴 하지만 떠나지 않으면 월급을 올려주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에 결국 나는 회사를 나왔다.



처음부터 ‘아이 없는 삶’을

살기로 한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이 없는 삶을 살기로 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때 우리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았을 뿐이었다. 당장 우리 둘이야 그런대로 이렇게 으쌰 으쌰 힘을 내어 살면 나름대로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부족한 환경 속에 아이가 생긴다면, 내 아이에게 풍요보단 절제와 인내를 먼저 가르쳐야만 할 것 같았다. 좋은 것만 보이고 좋은 것만 먹여도 모자랄 판에. 적어도 내 아이를 지금의 이런(책임져야 할 빚이 한가득하고, 월급이 나오네 마네를 걱정하고 있는) 환경 속에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달콤한 신혼 생활 속에서 꿈꾸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과 빠듯한 현실 생활 속에서 바라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의 간극은 생각보다 꽤 컸다. 이런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아는 부모님은 다행히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셨다. 한편으로는 내심 바라셨던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사는 게 당신들이 바라는 것이라며 우리의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아이가 생기면 돈이 없어도 다 저절로 채워지게 된다는 말, 어떻게든 다 살아진다는 말.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 전혀, 하나도 와 닿지 않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나는,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빚이 좀 줄어들면, 내 직장생활이 좀 더 안정화되면(월급이 밀리지 않고 제때 들어오는 멀쩡한 회사를 바라며), 이 집이 아닌 조금 더 나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언제가 될지는 당장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뚜렷한 시기를 모른 채 우리 둘은 이렇게 막연하게 ‘조금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며 하루하루 그냥 미뤄내고 있었다.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부모의 길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사실은.



그럼에도,

짧은 시간에 쌓아 올린 추억들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신혼 치고는 열악했던 환경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머님 댁에서 가져온 낡은 선풍기 앞에 얼굴 맞대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시원함 가득했던 여름이었다. 꽁꽁 얼어버린 가파른 계단을 매일같이 손 붙잡고 오르내리는 동안 얼굴에 스치는 차가운 바람보다 맞잡은 손의 따뜻한 온기가 더 기억에 남는 겨울이었다. 사람 때문에, 가족 때문에, 돈 때문에 겪은 갖은 수난과 슬픔,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남편과 내가 서로 의지하며 키워나간 ‘단단한 마음’ 때문이었다.


‘온갖 시련이여, 어디 올 테면 한번 와 봐라,
내가 못 이겨낼 것 같냐’하는 식의 베짱이 생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추억들이 지금의 단단한 우리를 만들었다. 과거와 다른 현재의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하지만 어떻게든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 당장 로또가 안되더라도, 당장 프리랜서로서 일감이 떨어지더라도, 이사 갈 집을 구하지 못해 고민이 앞서더라도.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게 될 거라는 믿음. 그 시절 짧은 시간 동안 쌓아 올린 추억들은 결국 우리에겐 세상을 이겨낼 힘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계단. 우리의 신혼집으로 들어가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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