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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Nov 17. 2019

말이 편한 남자, 글이 편한 여자

메일 하나 쓰는데 굉장히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 바로 나야 나.


돌다리는
천 번 정도 두드려야


문장에 있는 마침표 하나하나, 글줄 간격에도 다 의미가 있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거의 대부분 클라이언트에게) 이메일을 쓸 때면 괜히 신중해진다. 중요한 일정 혹은 전달사항만 확실하게 전해지면 그만인데, 항상 그 이상을 생각하다 보니 스스로 괴롭다.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일인데. 혹은 상대방에게서 오는 문자 혹은 이메일을 읽다 보면, 마치 있지도 않은 숨겨진 문자를 읽으려는 듯이 글에서 느껴지는 있지도 않은 감정을 억지로 찾아내려고 한다. (정말 피곤하게 산다 1)


이렇게 글 사이에서 오는 미묘한 감정이 스스로는 느낀다고 생각하니 비록 업무상 이메일일지언정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해진다. ‘너무 가벼워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딱딱하진 않으면서 일정과 요청사항을 잘 전달할 수 있는’ 글. 그런 이메일을 쓰려고 머리를 굴리는 덕분에 모니터 속 깜빡이는 커서는 남들보다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그런 사소한 글 잘 써서 나쁠 것 하나 없으니까. 어떤 글이든 글에서 글쓴이가 드러난다고 믿는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다.


그러다 보면 종종 막힐 때가 있는데, 대부분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클라이언트에게 안부 멘트를 쓰려고 하는데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을 때다. 혹시라도 괜히 실례를 하면 안 되니까 이리저리 검색해본 후 미리 멘트를 메모장에 몇 가지 써보기도 한다. (정말 피곤하게 산다 2) 진짜 이게 뭐라고, 사소한 거에도 너무 많은 고민을 하는 나. 남편은 이런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다.

 




쉽고 빠르게,

속전속결


남편은 나와 정 반대다. 무언가 결정을 해야 할 때, 그야말로 속전속결이다. 메일? 보내면 그만이다. 요청사항이 필요할 때? 메일로 쓸 시간에 전화를 한다. 서로 다른 일을 하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은 평소의 경우에도 남편은 결정력이 빠르다. 돌다리를 천 번 정도 두드려야 겨우 건너는 나와 다르다. 남편은 한두 번 두드려보고, 곧바로 건너간다.


얼마 전 이사로 짐 정리를 하며 남편의 정장 몇 벌을 정리했다. 너무 오래전에 샀던 정장들이라, 이참에 정리하고 새로 정장을 맞추기로 했다. 며칠 뒤 함께 쇼핑몰에 갔다. 쇼핑몰에 도착한 순간, 남편의 레이더 망이 가동됐다. 그의 레이더 망엔 오직 ‘정장’만 있다. 본인 머릿속에 있는 스타일과 예산, 브랜드가 맞는 매장을 발견하더니 쏙-. 그리고 거기서 마음에 든 옷을 몇 벌 입어보더니만 그 자리에서 바로 사겠단다.


“우리 거의 처음 온 매장인데? 더 안 둘러봐도 돼?”

“응. 이걸로 사자.”


아니 자고로 쇼핑몰에 왔으면 쇼핑몰을 전체적으로 좀 둘러보고, 간 김에 다른 것도 좀 보고.. 특히나 정장은 제법 큰 금액인데 몇 군데 돌면서 비교도 좀 해 보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번 마음먹은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아, 정말 볼 때마다 남편의 결정력을 닮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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