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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Nov 17. 2019

싸움의 기술, 대화의 기술

남편에게 쓰는 반성문

대부분 모든 걸 나에게 맞추는 남편의 행동을 잘 아는 주변의 친한 지인들에게서 간혹 듣는 말은, ‘너희도 싸우긴 하냐’는 얘기다. 결혼하고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안 싸웠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정말 생각보다 싸우지 않는 편이긴 하다. 그 이유라면 이유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건 정말 남편을 향한 나의 반성문 같은 글이다.


자, 여기 말이 편한 사람과 글이 편한 사람이 있다.

어느 날 둘은 대화를 하던 중, 말다툼을 하게 된다. 다음 중 속이 터지는 사람은?


1. 말이 편한 사람

2. 글이 편한 사람


뻔한 결과지만, 정답은 1번. 그리고 당연히 1번의 주인공은 바로 남편이다. 우리의 대화가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는 대부분 ‘내가. 답답하게. 말을. 잘 안 해서.’ 벌어지는 경우였다. 일 때문에 그날따라 기분이 좋지 않아서, 혹은 속에 있는 이야기를 알아주지 않아서 등의 나로서는 이유라면 이유이지만 사실 남편 입장에선 속이 터지고 환장할 노릇인 이유인 거다.


나는 대화가 싸움으로 번지면 일단 그 상황을 중단시켜 한껏 달아오른 화를 진정시키고 싶은 마음이 먼저다. 계속 이야기를 하면 점점 목소리만 커지게 마련이니, 일단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게 내 생각이다. 늘 그렇게 살아온 나는 그러다 보면 점점 잊히고 차츰 괜찮아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상황 자체를 문제로 파악하고 이 문제를 그 자리에서 당장 해결해하고 싶어 한다. 그래야 이 싸움이 멈춘다고 생각하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저녁, 오랜만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시작된 말싸움이라, 이번에도 역시 도중에 입을 닫아버린 나 때문에 냉기류가 온 집안을 휘감은 그 상태로 결국 다음날이 찾아왔다. 별다른 말 없이 그냥 출근한 남편. 그 와중에 잘 다녀오라며 배웅을 해줬다. 축 쳐져서 문밖을 나서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금방 풀어질 일인데 일을 키웠다. 내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
말로는 잘 안될 것 같으니,
문자를 보내자.


어젯밤엔 미안했다고, 자꾸 도중에 말 안 해버려서 미안하다고. 내가 사실은 이러이러한 생각이었다고. 아 아니다, 그냥 일단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해볼까? 어제 일을 다시 꺼낼까? 어쩌지? 머리로 온갖 생각을 하면서 습관처럼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런데. 어?


다이어리 한쪽에 내가 적지 않은 무언가가 끄적여있는 게 눈에 띄었다. 내가 먼저 잠들어버린 이후에 적어놓은 건지, 출근하기 전 적어놓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잔뜩 고민하며 적은 남편의 메모였다. 내(=나) 상황을 더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만(=남편) 생각해서 미안하고 나를 더 헤아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안하다는 내용뿐이었다. 



싸움의 순간을 일단 피하려는 자와, 당장 해결하려는 자.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으면 그 싸움은 절대 끝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 싸움을 멈추기 위해
남편은 먼저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따지고 보면 어젯밤 싸움의 원인도 어쩌면 나로 비롯된 일이었는데, 그래도 본인이 미안하다는 남편의 글을 보니 그동안 나 때문에 속이 썩었을 남편을 생각하니 아..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날, 나는 아침부터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내며 진심으로 반성했다.


마치 초등학생 같기는 하지만 그 뒤로는 무언가 속상한 게 있으면 말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속상했다. 하지만 이러이러해서 내가 미안해’라며.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남편의 행동에 점점 변하고 있다. 일단 어물쩍 넘어가려 하고, 속상한 감정을 뚱하며 속으로 삭히지 않으려 노력한다. 적어도 남편에게만큼은. 


여전히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노력해본다.

남편을 위해. 우리를 위해.


(남편이 알아주면 좋겠지만, 못 알아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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