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집에 커다란 식물을 들였다. ‘여인초’라는 식물. 큰집으로 이사 가면 꼭 한 번 키워보고 싶었던 식물이다. 사실 신혼 초 수경식물로 아이비를 잠깐 길러본 적을 제외하면 ‘반려식물’은 거의 처음이다. 가만 둬도 잘 자라는 선인장도 죽이는 나인데, 감히 커다란 식물이라니. 심지어 내 키 만 한 식물은 크기만큼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큰돈을 들이는 데 또 죽일 순 없지!
특별할 건 없지만 2주에 한 번씩 정해진 양의 물을 주고 집안을 오가며 식물을 관찰했다. 물을 잘 마시고 있는 건지 통풍은 괜찮은 건지, 불러도 (당연히) 대답 없는 여인초. 둘이 살기엔 조금 큰, 단 둘 뿐인 우리 집에 여인초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커갔다. 2주 정도가 지나니 원래 있던 새순에서 잎이 점점 자라났다. 처음 보는 광경에, 우리 둘에겐 매일 얼마큼 자라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이 생겼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식사인 저녁 식사를 위해 언제나 그렇듯, 집업실 퇴근을 하면 나는 곧바로 부엌으로 출근한다. 결혼 8년 차에도 여전히 요리다운 요리를 할 때면 매번 레시피를 찾아봐야 하는 나. 반복된 학습에도 이상하게 요리만큼은 매번 레시피를 체크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감으로 할 수 있는 요리는 별로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남편이 퇴근 후 집에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복닥복닥 저녁을 준비한다.
둘이 앉으면 끝나는 작고 동그란 식탁에 매번 놓는 반찬과 국 또는 찌개가 겨우 전부인 상차림. 간혹 요리 같은(?) 요리를 하긴 하지만 드물다. 그럼에도 언제나 내가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는 남편. 레시피 찾아서 따라한 거라고 말하는 내게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해서 맛있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는 남편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이다. 그 한 마디 한 마디 덕분에 소소한 우리의 저녁상은 근사한 상차림이 된다.
올해 가장 큰 목표였던 ‘이사’를 이루고 나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다음 여행’이었다. 매년 여행을 떠나는 게 경제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 년에 한 번,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서로 같은 건 참 다행이다. 아무튼 올해는 이래저래 책으로 여행을 대신했다. 2016년에 다녀왔던 유럽의 세 도시로. 내가 만든 책이 놓인 곳곳의 서점으로.
제법 멀리 가는 우리의 해외여행을 위한 준비는 일 년 전부터 시작된다. 직장 초년생일 땐 연차를 내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직급이 올라가면 연차를 더 마음대로 쓸 수 있겠지’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 직급이 올라가는 만큼 책임감도 점점 커진다는 걸 그땐 몰랐다. 대신 연차를 적게 쓰더라도, 연차 가능성을 좀 더 쉽게 가늠할 수 있다는 점.
일 년 전부터 여행을 준비하는 이유는 적은 연차지만 높은 가능성, 그리고 그만큼 보장된 공휴일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겨우 얻은 남편의 연차 날짜에 맞춰, 얼마 전 항공권을 다시금 구매했다. 작년 이맘때 항공권을 구매했다가 ‘이사’라는 계획으로 포기했던 그곳으로. 책을 만들며 내내 짧게 머물렀던 지난 시간을 아쉬워했던, 네덜란드로 간다.
여행이 즐거워 그 여행기를 모아 책을 만들었고, 그 덕분에 적지만 몇몇 곳에서 나를 ‘작가’라고 부르는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 작디작은 빌라에서 우리에겐 과분한 듯한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빚이 다시금 어마어마하게 생겼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일 할 이유가 생겼다. 우리의 조금 더 나은 행복을 위함이라고 생각하니, 언제나 일을 받아서 하는 을의 위치에 있어도 아직은 제법 버틸만하다.
새 잎이 돋아나는 것 하나에 함께 즐거워하고, 소소한 저녁 한 끼를 근사한 상차림으로 만드는 대화에 행복할 수 있는 일. 소중한 시간으로 얻어낸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 일하며 생기는 크고 작은 어려움쯤은 견딜 수 있는 일. 능력 밖의 거창한 계획을 억지로 세우는 것보다는 그저 작은 일 하나에 최선을 다하며 그 안에서 우리의 확실한 행복을 하나둘씩 쌓아나가는 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또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더라도
함께 잘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그래 왔듯이.
우리의 작고 확실한 행복은 우리 서로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