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되었으나 연결되지 않은 병원, 이유를 잊어가는 사람들
서윤은 오후 회의실에서 한참 말을 잃고 있었다. 방금 끝난 중간 관리자 미팅 때문이다.
회의는 늘 그렇듯 데이터로 시작되었고, 수치가 보여주는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이번 달 환자 수는 작년 동월 대비 9% 증가했습니다."
"평균 재원일은 줄었고, 신환 유입은 증가, 수익률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 중입니다."
실장은 보고서를 덮으며 덧붙였다.
"수치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들 예전보다 무기력하다는 얘기가 많아요."
서윤은 미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환자도 늘고, 성과도 나쁘지 않은데, 왜 무기력하다는 걸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문제일까?"
회의실 저편에는 도현이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단정한 차림,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분위기가 좀 무겁네요."
그는 조용히 서윤과 마주하고 앉더니 회의 자료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원장님, 병원이 성장하는데도 무기력을 느낀다고 하는 이유는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부재가 원일일 수 있습니다."
"의미의 부재요?"
"네. 병원이 커질수록 일은 나뉘고, 역할은 분명해집니다. 자신이 맡은 바를 열심히 하면 함께 하는 사람들과도 원활하고, 병원이 돌아가는데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루틴으로 그런대로 굴러가는 거죠.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가'를 잊기 시작하면, 시스템은 움직여도 마음이 서서히 멈춥니다."
유도현은 화이트보드에 그린 동그라미 안에 '방향성'과 '일체감'이라고 쓰인 포스트잍을 붙였다.
"조직일체감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내가 이 병원의 일부다라는 감정이에요. 그 감정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움직이지만,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그 동그라미 밖에 또 다른 두 개의 원을 차례로 그렸다.
"혹시 사이먼 시넥의 '골든 서클 이론(Golden Circle)' 들어보셨나요?"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Why) → 어떻게(How) → 무엇을(What) 순서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그거요?"
도현이 미소 지었다.
"맞습니다. 대부분의 조직은 '무엇을'부터 시작하죠. '우리는 교통사고 환자를 진료합니다.', '우리는 한, 양방 협진으로 수술 후 재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건 무엇(What)이에요. 중요한 건 왜(Why)?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왜 하는가?' 이 질문이 조직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사람들은 목표가 아니라 신념에 공감할 때 움직입니다. '이 병원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가 명확할 때, 직원들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사명으로 일하게 되죠"
그는 다시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방향성(Why)이 사라진 병원은 일체감(We)을 잃고, 결국 시스템(How)만 남습니다. 겉으론 돌아가지만, 중심이 비어버리는 거죠."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가.'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병원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단순한 질문이 오히려 멀어지고 있었다.
서윤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우리 직원들이 병원과 분리되어 있다는 뜻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죠. 예를 들어 진료실, 침구실, 물리치료실, 입원실— 각 부서가 완벽하게 역할을 해내지만
서로가 지향하는 방향과 일을 하는 목적이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건 이미 '하나의 병원'이 아닙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입원 환자들은 하루 두 번 정도 치료를 받습니다. 아침에는 주로 한의사의 회진과 침 치료를, 오후에는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죠. 하지만 문제는 그 모든 치료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환자 입장에선 '아침에 침 맞고, 오후엔 물리치료받았다'로 끝나요.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물건이 들어가 로봇 팔로 이것저것 지지직 거리며 수리 보완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자동화가 되어 편의성이 올라갔을지는 몰라도 치료들 사이에 연결된 방향과 설명이 없으면, 환자도 직원도 그 흐름 안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 병원이 느끼는 무기력의 근원이에요."
서윤은 곧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그런 구조 덕분에 효율은 높아졌어요. 분업이 없었다면 이 정도도 유지 못했을 겁니다."
유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효율과 의미는 다릅니다. 효율은 병원을 굴리고, 의미는 사람을 움직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런 구조는 이미 굳어버렸는데."
"잘 되어 있는 시스템이라면 그걸 바꾸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안에 '연결의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연결의 장치요?"
"서로 다른 부서가 같은 환자를 바라보며 '우리가 한 사람을 회복시킨다'는 감정을 공유하는 시간. 그게 회의든 브리핑이든 상관없어요. 사람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우리 병원'이 아니라 '우리 환자'라는 단어로 대화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유도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심리적 주인의식이에요. 사람들이 자기 일에 의미를 느낄 때, 조직의 주인이 됩니다. 하지만 시스템이 전부 관리로 돌아가면, 사람들은 주인이 아니라 '유지보수 인력'이 돼요. 잘 되어 있는 시스템과 매뉴얼대로라면 누가 와도 대체가 되겠죠. 하지만 거기에 의미가 빠져 있다면? 그게 과연 서윤님이 추구하는 병원의 모습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꽤 오래전에 들었어야 했던 말을 이제야 듣는 느낌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서윤은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각 진료실마다 불빛이 달랐다. 침구실의 따뜻한 조명, 물리치료실의 기계음, 입원실에서 새어 나오는 TV 소리.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병원은 그런대로 잘 돌아가고 있고, 각자의 자리에선 모두가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모든 장면이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벽에 손끝을 가볍게 대었다.
'같은 공간 안에 있는데, 모두 제각각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구나.'
무언가를 결심하기보다, 그저 그 사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문득 오래전 환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 여긴 불편한 게 많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따뜻하지도 않아요. 제가 다시 병원을 선택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아님 주변에 소개해야 할 일이 있다면...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이 지금에서야 마음에 닿았다.
병원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사람의 온기가 방향을 잃고 있었을 뿐이었다.
@ 조직일체감 (Organizational Identification)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 자부심과 정체성을 느낄 때 더 헌신한다.
"나는 이 병원의 일부다"라는 감정이 일의 질을 결정한다.
@ 심리적 주인의식 (Psychological Ownership)
'이건 내 일이다'라는 감정을 느끼는 직원은 통제 없이도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시스템은 효율을 만들고, 의미는 책임감을 만든다.
@ 골든 서클 (Golden Circle, Simon Sinek)
조직은 무엇(What)을 하는가 보다, 왜(Why) 존재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사람들은 목표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신념에 공감할 때 움직인다.
"이 병원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한 문장이 방향성을 만든다.
핵심 요약:
병원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건 시스템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이 "우리는 왜 이 일을 하는가"를 이해할 때, 조직은 비로소 하나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