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봐야하는데 자꾸 출연자들에게서 일하는 자세를 보게 된다
흑백요리사 시즌2가 지난 1월 13일 마지막 편이 공개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결말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스포 방지!!) 흑백요리사는 이전 시즌부터 부모님과 내가 모두가 재밌게 보는 예능 중 하나인데, 내가 본가에 방문했을 때 오픈회차를 새해 다음날이 될 때까지 봤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져서 봤다. 시즌1에 이어서 시즌2도 너무 재밌게 봐서 연말 연휴 내내 방구석에서 즐겁게 보냈다. 앞으로 26년에 더 재밌는 쇼 프로그램이 나올수도 있겠지만 근래 본 예능 중 제일 재밌는 예능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여하튼... 이 흑백요리사에서 어느 부분을 인상깊게 봤냐고 묻는다면, 나는 시즌1과 2을 모두 통틀어서 팀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얘기할 것이다. 왜 팀전이 인상깊냐고 또 묻는다면, 여기서 사람들과 그룹을 이뤄서 일하는 방식을 배웠기 때문에...(특히 팀전은 시즌1이 제일 재밌었다) 그렇다. 나는 흑백요리사로 혼자 일하든 누군가와 일하든 [일하는 태도]를 배웠다. 내가 일생동안 처음 보는 음식들이 아니라 그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더 집중할 줄이야.
흑백요리사 시즌 1,2는 네임드 셰프들이나 재야의 숨은 고수들이 모이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이 사람들은 서바이벌이라는 치열한 시스템에서 어떤 태도로 요리했을까. 그리고 이들이 모였을 때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요리를 완성했을까. 개인적으로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일하는 태도] 관점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을 몇 가지 짚어보면서 후기를 적어보았다.
- 이 글에는 흑백요리사 시즌2의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 우승자 스포는 없습니다!)
- 지극히 개인적인 후기이며, 반박 시 여러분들의 말이 다 맞습니다. 출연자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글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수정하겠습니다.
- 캡쳐 이미지의 출처는 넷플릭스 공식 유튜브 클립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넷플릭스 코리아에 있습니다. 문제 시 댓글 달아주시면 조치하겠습니다.
흑백요리사 시즌 1,2를 봤을 때 경력이 오래된 셰프 백수저, 그리고 그에게서 요리를 배운 흑수저의 매치가 흑백 요리대결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클래식과 트렌드의 대결 같다고나 할까. 이번 시즌 2 역시 그 대결 구도가 가장 재밌었다.
흑백 요리대결 중 이준 셰프와 그의 제자 삐딱한 천재의 대결에서는 둘의 차이가 극명했다. 이준 셰프는 기본기에 충실하고 반듯한, 삐딱한 천재의 말마따나 올곧은 요리관을 가지고 있었고, 삐딱한 천재는 틀에 박히지 않은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요리에 녹였다. [삐딱한]이라는 닉네임이 이준 셰프가 그에게서 한 말에서 나온 거라고 얘기할 정도라니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삐딱한 천재는 이준 셰프와 동점(1대 1)을 받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자신에게 가르침을 줬던 스승과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 그리고 그는 목표를 이뤘다. 이준 셰프 역시 대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옛 제자가 잘 해서 굉장히 기쁜 마음이라고 했다. [제자한테 지는건 좋은거야]. 이 흑백요리사의 세계에서는 그것 또한 자랑스러운 결과다. 이준 셰프는 이 대결을 통해서 또다른 요리를 배웠다고 인터뷰했다. 신예 요리사들과 대결하면서 대쪽같았던 그의 요리관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까?
그리고 아마 다른 분들도 모두 기억할 그 대사. "나를 업고 훨훨 날았으면 좋겠습니다". 프렌치 요리의 대가 박효남 셰프와 이 씬에서 꽤 유명한 프렌치 파파의 대결. 박효남 셰프는 후덕죽 셰프와 함께 요리계에서 긴 시간동안 내공을 쌓고 최고의 명성을 얻은 분이다. 두 분 다 고령에도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신 분들인데, 박효남 셰프가 프렌치 파파와의 대결 인터뷰에서 흑수저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했던 대사가 너무 기억에 남았다. 엄청난 연륜을 가진 두 셰프님은 자신들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셰프들을 마주했을 때 긴장하기도 했지만 흐뭇함 역시 컸을 것 같다.
이 부분을 보면서 2년 전에 썼던 실력 있는 주니어와 함게 일하는 시니어 글이 생각났다. 지금의 나는 출중한 주니어를 경계하고 있을까, 그들의 성장을 도와주고 있을까? 나 역시 수많은 주니어를 거치고, 지금도 간간히 멘토링을 하고 있다. 나도 그분들처럼 내가 피드백 주고 디자인을 가르쳐줬던 주니어들이 나보다 더 잘 하는 디자이너가 되길 바라고 그것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마 이번 시즌에서 가장 호불호 많이 갈리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정말 괴물같은 실력을 가져서 백수저들도 긴장하게 만들었던 요리괴물. 요리 서바이벌에 걸맞게 철저히 승부에 집중한 그의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다. 당연히 서바이벌이다 보니 누군가를 이기고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흑백요리사처럼 상대를 존중하고 함께 잘 되려는 [태도]가 그만큼 돋보이는 프로그램에서 요리괴물은 냉혹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아니면 악마의 편집일 수도 있고??)
그 시작점은 팀전이었다. 총 3번의 팀전. 2번째 팀전에서는 요리괴물이 리더가 되었고, 3번째 팀전에서는 팀원으로서 출전하고 칼마카세가 리더가 되었다. 아마 3번째 팀전에서 얘기가 많이 나왔을 것이다. 요리괴물은 칼마카세에게 할 일을 줘야 한다고 했고 요구했고, 칼마카세는 인터뷰에서 할 일은 찾아서 해야지 라고 얘기했다.
SNS 피드나 콘텐츠들에서는 [할 일은 찾아서 해야 한다]는 쪽에 더 공감했다. 이 전의 팀전에서 철저한 계획과 분담으로 팀을 이끌던 요리괴물의 모습에 사람들은 [너무 빡빡하다] [어느정도 실력 있는 사람인데 스스로 할일을 찾아서 할 수 있지 않냐]라고 비판했다.
반면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칼마카세가 리딩을 잘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 팀전에서는 처음 합을 맞추는 3명이서 새로운 음식을 내야 한다. 내가 봤을 때, 이들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처음 보는 3명이서 진행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에는 리더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아무리 실력 있고 경험 있는 사람이라도 새로운 프로젝트에 돌입하려면 누군가가 대략적인 방향이라도 잡아줘야 한다. 3번째 팀전의 결과물은 일식이었는데, 파인다이닝 셰프인 요리괴물이 이 일식을 만들기 위해 알아서 잘 할 수 있을까? 상황을 보니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레시피는 칼마카세의 머릿속에 있는 듯 했는데, 이 레시피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요리괴물같은 실력자도 자기가 뭘 해야하는 지 알 수 없다. 만약 요리괴물이 자신이 할 일을 찾아서 했어도 이 일이 레시피와 맞지 않았다면 시간만 허비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 [이 사람의 리더십은 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손종원 셰프였다. 애초에 빡빡한 플랜을 기본으로 가져가는 파인 다이닝 씬의 셰프답게 계획도 빡빡하게 새웠지만, 그 계획 속에서 변수는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손종원 셰프는 그 변수에서 자신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해결 방향을 잡아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손종원 셰프와 플랜을 짤 때 환하게 웃던 요리괴물의 표정은 덤)
흑백요리사 시즌 2까지 보면서 느낀 점은, 여러명이서 팀을 이루어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미션에서는 팀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는 점이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과 오래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도 누군가 중심을 잡고 방향을 정해주지 않으면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다. 흑백요리사에서 팀전을 제일 재밌게 봤지만, 정작 보면서 나는 조직에서 어떻게 일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이번 시즌에서는 요리계에 숨어있던 고수 흑수저보다는 백수저들이 더 돋보였다. 그 중 단연코 눈에 띄는 사람은 셰프들의 셰프, 후덕죽 셰프일 것이다. 중식 경력 50년, 요리사 최초로 임원의 자리까지 올랐고 현재까지도 주방에서 웍을 쥐고 있는 대가.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많은 중식 대가는 흑백요리사에서 자신의 제자, 또는 제자의 제자들과 함께 서바이벌 참가자로서 요리했다.
흑백요리사가 방영된 이후 사람들은 대가가 요리를 대하는 자세와 이 경연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그의 말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꽤나 보수적이고 위계질서가 확실한 요리계에서 자신의 칼을 가져다 쓴 후배 요리사에게 잘만 하고 있다며 웃어넘겼고, 자기보다 훨씬 후배인 요리사가 리더를 맡아도 군말없이 따르고 그를 적극 도와줬다. 단순히 참외를 버무리는 일에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후덕죽적 사고]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흑백요리사를 보면서 그가 정말 부러웠다. 누가 나이 80 될 때까지 일하고 싶겠냐고 하겠지만, 나는 [무언가를 한다]는 데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다. 우리 가족들 특징일지 모르겠지만 백수생활을 오래 하지 못한다. 연차가 오래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큰 고민은 [내가 내 나이 앞자리가 바뀌어도 디자인 일을 하고 있을까?]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가 들어서도 즐겁게 현장에서 일하는 그가 너무 부러웠다.
아마 고연차,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실무에서 뛸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것도 클 것이다. 30대 즈음이 되고 어느정도 일머리가 생기면 내가 항상 일해오던 방식을 내려놓고 다른 방식을 배우는 것이 가장 어렵다. 후덕죽 셰프가 현장에서 일을 배울 때와 지금은 요리를 대하는 태도나 생각하는 것들이 다를텐데, 흑백요리사에서 내놓는 후덕죽 셰프의 요리는 트렌드에 뒤쳐지거나 올드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롱블랙(https://longblack.co/)에서 후덕죽 셰프의 인터뷰를 봤을 때 정말 많은 문장들을 스크랩 했는데, "하나만 고집하면 안된다"라는 말이 그를 관통하는 말이라고 한다. 위에서 얘기한 요리에서의 수용성도 있지만 후배 요리사들과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줬다는 것에서 사람들은 더 좋아했다. 이는 바로 [후덕죽적 사고]로 정의되었다.
나도 그처럼 정말 현장에서 오래 일하고 싶다. 실무자든, 매니저든, 디렉터든 디자인 필드에서 오래 일하고 싶다. 요리계보다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빨라지는 IT/디자인 업계에서, 더 오래 일하려면 (또는 이 변화에 탑승해서 다른 방식으로 업계에 남아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흑백요리사에서 열심히 웍을 돌리고 음식을 만드는 후덕죽 셰프는 나의 커리어 관련 데이터에 또다른 인사이트가 되었다.
흑백요리사 시즌1 이후 여경례 셰프가 유튜브에서 한 말이 있다. [이겼는지 졌는지는 금방 잊는다. 최대한 실력을 많이 보여주는 것은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의 말은 진짜였다. 시즌1에서도 승패 가리지 않고 출연자들의 요리 태도와 말들이 가장 오래 남았다. 아마 시즌2도 그러할 것이다. 물론 이번 우승자는 많이 인상깊었기 때문에 더 오래 기억에 남겠지만...!!
사람들은 재미를 찾기 위해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예능/쇼 프로그램을 본다. 정말 순수하게 재미와 도파민(!)을 위해서 재밌는 프로그램을 찾기도 하지만, 의외로 이런 프로그램들에서 삶의 태도나 일하는 방식의 영감을 받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그러는 것처럼, 영상 속의 사람들의 모습은 나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준다. 그렇게 나는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일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다음 시즌3도 계획된 것 같은데, 이 다음에는 어떤 좋은 영감들을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