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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star 씨애스타 Oct 23. 2022

미켈란젤로 출세작과 유작, 피에타

eye Magazin 02. 66년 시간의 차이

"자비를 베푸소서" "슬픔" "비탄" 등의 의미를 가진 이탈리아어 피에타( Pietà )는 기독교 예술 주제 중 하나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떠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것을 말한다. 1992년 바티칸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는 순간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유난히도 많은 마리아의 옷 주름은 대리석이라는 딱딱한 재료가 아닌 마치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구김처럼 자연스러워서 역시 거장의 작품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들을 잃은 마리아의 슬픔이나 비통함은 느껴지지 않았고, ‘미켈란젤로 참 대단하다, 천재다’란 말만 입에서 맴돌았다. 그의 천재성과 완벽한 기술은 알겠는데 왜 제목인 ‘슬픔’과 ‘비탄’의 감정은 공감이 안될까? 무엇보다 이 완벽한 작품에 나는 왜 감동하지 않는가?

 

미켈란젤로가 24세에 만든 바티칸의 ‘피에타’



이 의문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기에, 작품을 여러 번 들여다보면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점들을 찾아보았다.


첫째, 33살 예수의 어머니라기에는 너무 젊은 마리아의 얼굴
둘째, 사후 경직으로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져야 하는데도 아직 살아있는 듯한 자연스러운 몸(죽은 사람인데 다리를 직각으로 하고 있어 솟아오른 근육과 힘줄, 심지어 뒤쪽 다리는 앞쪽에 가려질까 살짝 더 들고 있어 두 다리가 겹치지 않고 잘 보인다).
셋째, 아들의 죽은 시신을 받은 어머니라면 당연히 끌어안고 통곡할 텐데 아들을 안은 마리아의 어색한 자세와 어깨에 두른 띠...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그 이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피에타로 이십 대에 유명한 조작가가 되었지만, 당시 무명이었기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의 작품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완성된 마리아의 옷 주름을 다시 파내려 가 띠를 두르고 ‘미켈란젤로가 새기다’란 글을 새겨 넣었다는 설명을 누군가에게 듣고서 그때서야 궁금하던 것의 실마리가 풀렸다.

자신의 천재성과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피에타를 조각한 미켈란젤로는 뻣뻣하게 사후 경직이 일어난 몸이 아닌 아직 피가 도는 살아있는 예수, 33살 아들을 가진 엄마로서 마리아가 아닌 성령을 잉태한 아름다운 마리아를 조각한 것이다.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에 대한 아픔을 알 수 없었을 젊은 미켈란젤로는 마리아의 슬픔보다는 아름다움을 선택했지만 그 아름다운 마리아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띠를 두르게 함으로써 스스로 그 아름다움에 흠집을 냈다.

미켈란젤로는 이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여러 번 피에타를 조각했고, 죽기 며칠 전까지 작업한 작품이 ‘론다니니 피에타’다. 이름을 알린 작품도 죽기 직전까지 작업한 유작도 피에타인 것이다. 이태리 밀라노 스포르자성에 전시된  ‘론다니니 피에타’를 보기 위해 둥근 나선형 계단을 따라 사람들과 줄을 지어서 내려갔을 때가 수십 년 전이지만 생생하게 생각난다. 계단 아래 아직 작품이 보이지도 않는데 계단을 내려가며 사람들이 하나, 둘 울기 시작했다. 분위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나도 눈물이 났다. 눈물 속에서 본 ‘론다니니 피에타’는 돌을 깎다 만 것 같은 덩어리였다. 언듯 보면 누가 마리아인지 예수인지 구분도 가지 않고 마치 덩어리로 한 몸으로 보였다. 표정도 없고 팔다리의 비례도 안 맞고 심지어 팔은 없어 보였다. 예수가 마리아를 업은 것 같기도 하고, 마리아가 뒤에서 안은 것 같기도 했다. 옷은 입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란 설명이 없으면 솜씨 없는 조각가의 연습작이자 미완성작으로 보였다. 코도 뭉개지고 눈도 동그라미뿐인데도 그 작품을 보니 눈물이 솟구쳤다. 그냥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작품 앞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울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코끝이 시리고 눈물이 핑 돈다. 한참을 말도 못 하고 울다 돌아서서 나오면서도 여러 번 피에타를 돌아보았고, 한동안 그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88세 때 완성한 ‘론다니니 피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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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가까운 기술을 보인 바티칸의 피에타와 미완으로 보이는 이 작품 사이에는 66년의 시간이 있다. 이십 대에 완벽한 기량을 갖춘 그가 죽기 전 육십여 년간 추구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이 보이게 하는지는 명확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슬픔과 비통함, 감동은 없고 천재 미켈란젤로와 성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잘된 작업이기보다는 실패한 작품으로 보인다. 미완성인지 완성인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거기에는 하늘의 아들이 아닌 내 아들을 잃은 슬픔과 비통함이 절절하게 담겨있고, 감동이 있다.

감동을 주는 작품은 기술도 천재성도 완벽함도 아니다. 내가 무엇을 전달하느냐는 재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론다니니 피에타 작업을 할 때 저녁이면 걸어가지도 못해 하인에게 업혀가면서도 죽기 전까지 이 작업에 몰두했다고 한다. 자지고 먹지도 신발도 벗지 못하고 작업에 몰두해서 퉁퉁 부은 발 때문에 신발을 칼로 찢어야지 벗을 수 있었다는데, 그때 자신의 살점이 신발에 같이 붙어 뜯겼다고 한다. 나는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미켈란젤로의 '66년 차이나는 두 피에타'를 통해서 배웠는데, '론다니니의 피에타'만큼 울게 만든 작품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그림 그리는 것을 알려주는 <잘 그리면 반칙> 그림방의 시작은 이 작품을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알려진 작품이라 이미 알고 있는 분들도 직접 보신 분들도 있을 테지만, 알고 있던 작품이라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보는 것은 중요하다. 유명한 작품이라도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돌덩이나 종이에 불과할 수 있다. 물론, 아무 감동이 없다가 어느 순간 그 작품이 내게 말을 걸고 내게로 올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평가로 유명세로 그 작품을 봐서는 안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당연히 알면 더 잘 보인다. 하지만 예술 작품은 깊게 보아야 한다. 내 눈으로 마음으로 깊게 느낄 때 작품에 대한 감흥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분명 그땐 그 전과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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