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평온한 일상도 소원이 되어 버렸다
체코 프라하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차가운 거리와 아름다운 불빛의 조합은 프라하에 첫 발을 내딛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멈출 줄 모르는 감탄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프라하의 밤거리는 참으로 황홀했다. 하지만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 안타까움이 나의 심장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까를교 다리 양쪽에는 여러 동상들이 있었다. 그중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특별한 동상이 있다고 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다리 위에서 나는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 요한 네포무크 동상’을 보니 반가웠다. 왠지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은 기류가 흘렀다. 이 동상의 일부를 문지르면서 소원을 간절하게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정성을 다해 애원하듯 빌었다. 그렇게 무엇이라도 붙잡고 마음의 응원을 해야 그나마 덜 미안할 거 같았다.
“제발 그녀를 살려 주십시오. 그녀는 더 살아야 합니다.”
나의 소원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위해 집중적으로 빌었다.
함께 동유럽여행을 하기로 한 그녀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면서 여행 가기 전 건강검진을 받은 후 마음 편하게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맙소사, 가벼운 소화불량 정도로 생각했는데 상상도 못 할 일이 터지고 말았다. 췌장암 3기. 다른 부위에도 전이가 되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했다. 어떻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럽고 한심스러웠다. 그저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속히 회복되기를 위한 간절한 기도밖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무능함의 현실 앞에 내 마음은 더 무겁게 짓눌렸다.
상상도 하지 못할 기막힌 현실 앞에서 여행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간곡한 부탁으로 계획했던 여행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생각도 하기 싫은 난감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부탁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때부터 여행을 떠나는 날까지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가슴이 미어지듯 저며오는 이런 슬픈 여행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오지 말 걸 어쩌자고 저 하늘 너머까지 왔는지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나는 프라하의 멋진 야경을 전경에 두고, 그곳에 머물면서도 마음껏 즐기지 못했다. 그 당시 그녀를 좀 더 설득하여 함께 동행하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며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프라하의 밤거리를 폼 나게 거닐며 삶을 이야기하자던 그녀였기에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비록 프라하의 야경은 함께 나누지 못했지만, 다음 여행지 크로아티아의 야경은 반드시 그녀와 함께 볼 수 있기를 소망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사실 일정 내내 편치 않았던 무거운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지 못했다. 마치 그 마음을 위로하듯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대자연의 막바지 가을 풍경이 옷깃 사이로 살포시 스며들었다. 유럽의 가을 낙엽을 밟으며 미안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웃음이 사라진 얼굴에 미소를 띠려 애를 써 보았으나 여전히 슬펐다. 얼마만큼 걸었을까,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노란 나뭇잎 사이에선 따듯한 기운이, 따스한 햇살 사이론 왠지 힘이 날 것만 같은 좋은 기운이 마구마구 품어져 나온 듯했다. 그 기운은 마치 희망을 약속하듯 포근하게 다가왔다.
문득 이 가을이 다 가기 전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 속에 나의 모든 걸 맡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리곤 내년 이맘때에도 변함없이 가을 풍경을 맞이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무탈하게 내일이 보장되는 삶은 어디에도 없는 걸까.
애석하게도 내가 탑승한 시간이란 존재는 멈출 줄도 모르고 기다릴 줄도 모르며 오로지 직진만 할 줄 아는 얄미운 존재인 것 같다. 그렇기에 오늘 내게 주어진 지금의 시간을 좀 더 나 답게, 좀 더 나에게 집중하여 사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프라하에서 빌었던 소원이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여전히 아픈 마음을 달래 본다.
그녀는 지금 하늘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