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면 나 거기에 머물리
새벽 두 시였다. 고요한 쉼의 시간에 빠져 있는데 느닷없이 짐을 챙기라는 남편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유인즉슨 겨울 바다가 보고 싶다는 딸의 말 한마디에 비상금도 없이 달랑 카드 한 장 들고 부랴부랴 집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남편은 회식으로 인해 운전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설마 음주 운전을 강행할 목적으로 가족을 태운 것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뭔가 불안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남편은 대뜸 조수석에 앉아버렸다. 결국, 운전은 내 몫이었다. 당시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딱 보름 정도 지날 무렵이었다. 머릿속이 하얬다.
말하자면 깜깜한 그 밤, 남편은 나에게 담력을 키워야 한다며 고속도로에서 운전 연수를 시켜주겠다는 거였다. 가는 길에 바다도 보고 운전 연습도 되니 일거양득 아니겠냐며 당당하게 몰아붙였다. 나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이 엄마의 초보운전 실력을 믿을 수 없어 불안하다면서 다음에 가자고 했는데도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어쨌거나 타협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조수석에 앉은 남편은 그때부터 하나하나 간섭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두렵고 긴장된 마음을 안전띠로 단단하게 무장한 후, 마침내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출발했다. 두 손은 운전대에서 떨어질세라 꽉 붙잡은 채 주행 중인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어차피 나중에 운전은 한 손으로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지금부터 연습해 봐.”
“안돼. 난 지금 앞만 보고 가는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무슨 소리야. 더 말 시키지 마. 심장 떨려 진짜 죽을 거 같단 말이야.”
가까스로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내 손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운전대에서 잠시도 손을 뗄 수 없으니 닦을 수도 없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아이들이 불안에서 조금 벗어난 듯 휴게소에 들러 먹거리를 사자고 했다. 마침 나도 화장실도 갈 겸 좋다고 했다. 그때 2차선에서 주행 중인 나는 휴게소 진입을 위해 끝 차선으로 차선 변경을 해야 했다. 아뿔싸! 차선 변경을 제때 하지 못하여 결국 휴게소를 지나치고 말았다. 잔뜩 긴장한 탓에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볼 수 없었고 당연히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의 원망 소리를 들으니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계속 직진밖에 할 수 없었던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가야 하나 더욱 막막했다. 다리는 점점 경직되었고, 잠잠하던 불안은 다시 나를 집어삼킬 태세인지 나의 시야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어둠의 시간이 흘러가는 틈 사이로 괜스레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어쩌자고 나에게 이런 고통을 떠맡기는지 생각할수록 울컥 화가 치밀었다.
계속되는 아이들의 원망을 듣는 척 마는 척하다가 결국 두 번째 휴게소가 나올 때까지 맨 끝 차선으로만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앞에 가는 트럭만 따라가는 꼴이 되었다. 조금 답답하긴 했어도 차라리 그게 훨씬 나을 것 같다면서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자 마침내 휴게소가 보였다.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제발 지나치지 말고 우회전 깜빡이 켜고 천천히 진입하세요.”
“알았어. 근데 왜 좌회전 깜빡이가 켜지지?”
역시나 당황하여 안도의 숨을 쉬기도 전에 벌써 등에서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휴게소에 도착한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차에서 쉽게 내리질 못했다.
"에고, 나 이대로 죽을 것 같아."
정신을 차려 겨울밤의 찬 공기를 마시고 나니 그제야 긴장했던 나의 세포들도 한시름 놓은 듯했다.
그랬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자지 않을 거라며 호언장담을 하던 남편은 어느 틈에 잠들고선 한밤중이었다. 믿었던 내가 바보였음을 누구한테 하소연할까. 어쩌면 애당초 남편은 운전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사실상 운전 교대를 포기한 채 어둠을 뚫고 한참 동안 직진만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춥다면서 따듯한 히터를 켜달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주행 중에는 아무것도 조작할 수 없었다. 운전대에서 잠깐이라도 한 손을 떼면 이내 차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오직 아이들을 위해 히터를 찾아서 켜주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따듯하기는커녕 오히려 아까보다 더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맙소사, 에어컨을 켰다.
얼마큼 지났을까. 어렴풋이 어둠이 걷히고 새벽녘을 지나 먼동이 트는 듯 건물 사이로 언뜻언뜻 정열적인 바다를 거침없이 뚫고 나온 것 같은 붉은 하늘이 보였다. 맥박이 빨라지며 마음이 설렜다. 하마터면 신호를 무시하고 무작정 바다까지 갈 뻔했다. 멀고도 먼 길을 얼떨결에 달려와 첫눈에 반한 겨울 바다, 부산의 해운대였다. 우리 가족은 주차하자마자 추운 줄도 모르고 모래사장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인적이 드문 바닷가 한가운데 우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발 도장을 찍으며 아이들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밤새 쪼그라든 몸과 마음이 모처럼 휴식을 취하는 듯 그때야 비로소 안정된 쉼을 누리게 되었다. 비몽사몽 간에 흩어졌던 불안하고 초조했던 감정들도 다시금 내 안으로 들어와 평온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어떻게 보면 그날의 혹독한 초보운전의 연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워낙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황당함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일을 통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해운대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뜻밖의 상황은 오래도록 내 삶에 잔잔한 파도처럼 남을 듯싶다.
그로부터 십 년이 훨씬 지난 요즘, 문득 해운대의 아침 햇살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