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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리형 Sep 17. 2019

글쓰기 좋은 날, 좋은 시간

오늘 하루도 크리에이터

 호텔 체크아웃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급하게 짐을 챙기고 주섬주섬 옷을 걸치다 갑자기 머릿속에 좋은 글감이 떠올라, 하의만 대충 입은 채로 책상에 앉아 노트와 만년필을 꺼냈다. 시계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20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10분 정도면 충분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트의 빈 페이지를 피고서 만년필 끝을 왼쪽 위 여백의 공간으로 향했다. 방금 떠오른 생각의 제일 첫 꼭지를 찾았다. 어떤 말로 처음을 시작할지가 잡히면 글은 술술 써내려 져 간다. 글의 최종 완성은 컴퓨터의 자판으로 하더라도, 이렇게 무언가 떠오른 생각을 받아 적을 때는 항상 노트에 만년필로 기록한다. 자판은 빠르게 쓰는 게 가능하기에, 가끔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글이 먼저 나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만년필은 그렇게 빠르게 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항상 일정한 리듬을 갖고 생각이 한문단씩 묶이고 난 이후에나 노트에 적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떠오르는 생각을 마구 적어 내려갈 때도, 그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적다. 적당한 정리가 이미 이루어진 글이기에 나중에 컴퓨터에 옮기고 퇴고를 할 때도 쉽게 쉽게 정돈이 된다.


 살짝 열어둔 창틈으로 늦여름의 사글사글한 바람이 흘러 들어온다. 등을 돌리고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흰 커튼이 나풀나풀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구름에 가려 너무 강하지 않은 햇살이 등에 와서 닿는 감촉이 좋다. 창문 바깥으로는 온통 산이다. 커피라도 마시면서 느긋하게 바라보고 싶어 지는 풍경이다. 이럴 때 조금 더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랬다면 오히려 지금처럼 집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느긋함에서 나오는 글은 따로 있다.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압박감이 나를 온전히 더 집중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렇게 순수한 상태에서 글을 써보는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잡념은 글을 쓸 때마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글을 쓰려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생각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온갖 의미 없는 관념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생각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겨우 한 문장씩 보물이라도 캐내듯 쓸만한 문장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광이 나도록 닦아 내고 나서야 비로소 글 안에 끼워 맞출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순수하게 현재에 집중되어 있을 때 쓰는 글은 다르다. 마치 세탁기에서 건조까지 다 된 세탁물을 끄집어내듯 단어와 문장이 완성된 형태로 줄줄이 엮어져 나온다. 앞 문장에 이어 뒷문장까지 줄줄이 따라 나온다. 이렇게 몰입된 상태에서 글을 쓸 때의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글을 쓰는 시간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 생각의 쓰레기 더미 한복판을 헤매야 한다는 것.


 홀리듯 써 내려간 글이 2페이지의 끝에 도달했을 때 즈음, 다행히 생각과 글도 그걸로 마무리가 지어졌다. 글의 끝맺음이 페이지의 끝과 일치할 때의 깔끔한 기분이란! 5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기에 마지막 한 문장을 조금 더 고민해 본다. 사실 고민을 한다고 더 좋은 문장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은 더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다. 생각 끝에 결국 원래 쓰려고 했던 문장을 적어 넣고는 노트를 덮는다. 그 짧은 시간에 머릿속을 휘젓던 한 생각을 깔끔히 형태화 시켰다는 생각에 호텔방을 나오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이 잘 정리되어 글로 완성된 그 순간의 기쁨은 글을 써본 사람만이 안다. 


 글이던 그림이던 조각이던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그렇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과 생각들을 누구나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빚어내는 것이다. 원재료가 어떤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도 중요하다. 물론 나의 능력 부족으로 내가 원하는 만큼 깔끔하게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더 나아질 것을 믿고 매일 꾸준히 해 나갈 뿐이다. 예전에는 무엇을 하건 나 자신이 즐거울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지금은 기왕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행위를 하려고 한다. 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좋은 날, 좋은 시간은 분명 존재한다. 바로 오늘 같은 날 말이다. 하지만 그날만 기다리다가는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그냥 한다. 하다 보면 좋은 날도 만나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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