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대한 사소한 고찰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삼청동 어느 카페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나에게 네가 물었다. 조금의 틈만 있으면 혼자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던 내게 너는 자주 그 질문을 했다. 테이블 위에 엎드리듯 붙어 팔에 턱을 괴고는, 고양이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하얀 얼굴 위로 검은 붓 칠이라도 해놓은 듯 예쁘게 휘어진 긴 눈썹과 쌍꺼풀 없는 큰 눈. 내 앞에 네가 없는데도, 마치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마음은 그 순간으로 가있다.
너를 처음 본건 홍대 뒷골목에 있던 작은 술집에서였다. 날씨가 막 추워지기 시작한 초겨울에 친구와 술을 마시다 막차시간이 지나버린 어느 밤이었다. 아침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적당한 가게를 찾다가 너무 추운 나머지 그냥 눈앞에 보이는 실내 포차에 들어갔다. 가게 내부가 좁아 손님이 두 테이블밖에 없었음에도 꽉 찬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사람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맞은편 테이블에서 친구 2명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뒤편에 있던 술 취한 아저씨들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묻혀 너와 네 친구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름 취기가 오른 네 친구의 목소리가 서서히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새끼,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내가 꼭 지켜본다"
아마도 얼마 전 헤어진 (분명 차임을 당했을) 남자친구의 험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너는, 그때까지 별로 눈에 띄지 않았었다. 내가 너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한 순간은 너의 다른 친구 한 명이 걸쭉하게 취한 (얼마 전 실연당했을) 친구를 부축하듯 데리고 나가던 그때였다. 적당히 술이 오른 얼굴 위로 옅게 피어있는 분홍빛의 핏기가 내게는 강렬한 생명력의 꿈틀거림처럼 보였다. 동그란 얼굴에 쌍꺼풀 없는 눈, 평면적인 얼굴에서 유독 돋보이던 오뚝한 코. 별로 특별하게 예쁠 것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나의 시선은 무의식중에 계속 너에게로 향했다. 친구를 부축하고 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인지 너와 친구들이 나간 테이블 위에 핸드폰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지만 나는 그걸 직접 너에게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급하게 그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너를 쫓아나갔다. 다른 한 명의 친구가 만취한 친구를 부축한 채 택시에 타고 있었고, 잠시 후 길가에는 너만 혼자 남게 되었다.
"저기요"
너를 불러 세우고는 잊고 나간 것이라며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너는 완벽할 정도로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만 짧게 뱉고는 휙 돌아섰다. 술기운이었던 게 분명했을 것이다. 아니면 한겨울의 추위에 현실감이 없어진 뇌가 이상 작동을 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숫기없는 내 성격에 제정신이었으면 절대 못했을 말을 너에게 한 건.
"혹시 술 한잔 더 하지 않을래요?"
뚝 하고 멈춰 선 네가 뒤돌아 나를 마주 보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초 남짓이었지만, 내게는 마치 영화 속의 슬로모션을 보는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나를 응시하는 너의 눈빛은 마치 처음 본 사람을 탐색하는 고양이 같았다. 그래, 너는 언제나 그런 고양이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게 너란 사람의 고유한 식별표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너는 별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싱거운 말투로 '어디서요?'라고 대답했다.
기억을 꺼내어 보는 건 앨범을 넘겨 보는 것과 비슷하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꺼내 듯 마음에 드는 기억을 꺼낸다. 사진과 다른 점은 그렇게 꺼낸 기억을 내 마음대로 몇 번이나 고치고 덧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은 밑그림부터 다시 그린다. 고치고 고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무엇이 진짜 기억이고 무엇이 다시 그린 기억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기억 속에 있는 너와 나는 있었던 그대로의 우리가 아니다. 그 소중한 순간들은 한순간 번쩍 빛을 내고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가끔 떠오르는 우리의 모습들은 단지 그 반짝거림의 잔영일 뿐이다. 잊지 않으려 기억하고 기록해 두지만 그 어떤 노력으로도 찰나의 우리를 담아두지 못한다. 떠올린 횟수만큼 변형되다가 결국에는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달라진다. 그렇게 취향대로 가공한 기억을 붙잡고는 마치 그게 사실이었다는 듯 수백 번을 되돌려 본다.
우리가 사귄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막차가 끊기게 된 어느 밤에 너는 처음으로 나를 네 집으로 초대했다. 술이 약한 나는 캔맥주 하나를 사들고, 술이 센 너는 소주 한 병을 사들고는 아직 술이 부족하다는 걸 이유로 아침까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물론 핑계 삼아 가져간 술은 한 모금씩 밖에 마실 일이 없었지만… 그렇게 두 청춘의 시름은 깊은 밤에 묻히고, 따스함만으로 온통 행복한 밤이었다.
"오래도 잔다"
눈을 뜨자마자 너의 얼굴이 보였다. 옆에 누운 네가 그 특유의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걸까. 내가 눈을 뜨자 너는 졸린 듯 하품을 하더니 반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막상 긴 시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그날 그 한량스러운 오후의 대부분을 잠든 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하루가 다 가버렸다.
‘뭐라고 했었지?’
이태원의 한 술집에서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다 머리가 지끈 하고 아파졌다. 분명 흐릿하게 떠오를듯하다가도 곧 기억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처음 나를 봤을 때는 내가 별로라고 했던 것도 같고,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대사가 마치 한 장소에서 평행우주라도 그리듯 동시에 떠오른다. 나를 싫어했던 너와 나를 좋아했던 네가 동시에 같은 장소에 있다. 그 두 개의 기억을 붙잡고 나는 또 씨름을 한다. 이제 와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 이제 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니?!!
어느 날씨 좋은 봄날에 카페에 들러 책을 읽던 나는, 문득 비현실적인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눈을 들어 앞자리를 보았더니 그곳에는 마치 한참 전부터 그러고 있었다는 것처럼 네가 엎드려 있었다. 햇살이 통창으로 비치는 자리에 앉아 등을 한껏 낮추고는 장난스럽게 눈을 치켜뜨며 나를 훑어본다. 그 고양이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안녕? 또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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