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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Nov 12. 2019

이해와 용납 사이

살다 보정말 이해는 되지만 용납이 안 되는 일이 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나 용납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우리는 상대가 잘 이해하고 넉넉히 용납해주길 바라지만 실제로 어떤 상황에 부딪혀보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해와 용납 사이에는 여러 변수들이 작용하며 거리를 만들고,  간격은 회사와 집에서 각각 다르게 느껴진다.


회사 대부분 이해와 용납이라는 두 단계를 거친다. 상대가 어떤 일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하고, 용납이 되어야 일이 진행된다. 회사에서 보통 이해를 주고받기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서로 상대의 입장을 알고 있기에  상황이라면 그렇겠거니 이해한다. 크고 작은 실수를 발견했을 경우에도, 누군가 과도하다 싶게 요구할 때도 그렇다. '하필이면 그때' 그런 일이 겹쳐 일어나서 실수가 생겼고, 스스로 해결하기 버거우니 넘기고 싶어 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그 사정은 백번 이해할 수 있으나 용납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스스로 용납할 지위나 처지가 안 되는 경우도 많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판단이 신중해진다. 그래서 회사의 많은 일이 이해는 쉬우나 용납하기는 어려운 범주에 속하게 된다.


에서의 일은 회사와많이 다르다. 우선 아내나 아이들이나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부터 안 된다. 하는 얘기를 들어봐도 마찬가지다. 사실 밥을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자는 생활공간을 공유한다고 해서 이해도가 높아지는 건 아니다. 정해진 매뉴얼의 틀에서 오랜 시간 겪어온 회사일에 대한 이해가, 복잡한 일을 리되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해결해야 하는 집안일에 대한 이해보다 훨씬 쉬운 편이다.


아이들은 보통 어른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며 지내기 마련이라 이해 단계부터 삐꺽인다. 그렇다고 '몰이해&무용납'을 선언하고 충고와 조언 모드로 들어서는 순간 임은 끝이다. 마무리는 결국 귀 담아 듣는 이 없는 일방적 속풀이 독백이다.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우선 받아들여 인정하고 지켜보는 편이 훨씬 낫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에 소개된 일화가 있다. 엄마는 초등학생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를 때렸다는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서, 아이가 집에 오자마자 앉혀놓고 어찌 됐든 폭력을 먼저 쓴 건 잘못이라고 나무랐다. 그러자 아이, '엄마는 나한테 그러면 안되지. 내가 왜 그랬는물어봐야지.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하며 엉엉 서럽게 울었다. 


아이들은 굳이 우리가 거듭 이야기하지 않아도 생각보다 이미 잘 알고 있다. 선생님에게 꾸중 듣고 왔을 것이 뻔한 아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 엄마는 또 혼낼 것이 아니라 아이 편에서 공감해야 했다. 이해보다 공감과 용납이 먼저다.

우리가 살아가며 하는 일들이 깎아만드는 것에 가까울지, 아니면 빚어서 만드는 것에 가까울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조각가는 돌이나 나무 같은 단단한 재료를 가지고 조금씩 때려 떼어내거나 깎고 갈아서 형체를 만들어간다. 까딱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어 조심스럽지만 결과물은 견고하다. 


반면 빚는 과정은 찰흙과 같이 말랑말랑한 덩어리를 뭉쳐 잘 쓰다듬고 붙여가며 서서히 모양을 만들어간다. 조금 틀리더라도 다시 잘 만져서 굳기 전까지 모양을 조정하면 된다. 깎아 만든 것보다 단단하지는 않더라도 만들기 수월하다.   

상에 정말 쉬운 일이 무엇인가 지적하는 일이다. 이해는 잠시 내려놓고 자기 기준에 용납이 안됨을 내세우면 된다. 하지만, 쉽게 하면 안 될 일을 쉬운 일인 양 처리하면 언젠가 탈이 난다. 결국 관계에 서로 상처가 남는다. 이해하려는 마음가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용납하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깎아내는 것보다는 조물조물 만져가며 천천히 모양을 다듬어, 공감 속에서 서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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