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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Dec 29. 2019

앉을 곳이 있다

길상사 경내는 넓지 않지만 다른 절에 비해 앉을 곳이 많다. 벤치라고 그냥 부른다면 듣기 서운할 법한 다양한 의자들이 경내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어떤 의자는 그냥 나무 둥치나 넙적한 바위이기도 하며, 어떤 의자는 나무나 돌을 다듬어 만들었다. 탁자와 쌍으로 배치되어 있거나 나무 아래나 시냇물 언저리에 둘셋이 흩어져 있기도 하고, 명상하는 이들을 위한 의자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아침 일찍 들른 길상사는 잠에서 일어난 부지런한 새들이 주인이 되어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와 풀숲 사이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새들이 지나다니는 인적 없는 의자에는 마른 나뭇잎만 바람을 따라 쉬어가고 있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신자나 관람객, 근처 산에 온 등산객들이 몰려와 앉아 담소를 나눌 것이었다.

우리는 의자에 앉으면 항상 무엇인가 마주하게 된다. 컴퓨터와 마주 보며 업무를 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고 책을 본다. 공연을 관람하고 다른 이와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길상사 의자들은 나에게는 그와 조금 다르다. 그곳에는 무엇을 하려고 앉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앉아서 나무와 바람과 새들이 내는 소리와 풍경을 마주 보며 시간을 보낸다.

어딘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좋다. 빨리 달려왔으면 숨을 고를 시간이 되고, 오래 걸어왔다면 다리를 쉬어갈 시간이 된다. 앞만 보고 왔으면 주위를 돌아볼 시간이 되고,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면 잠시 토닥거릴 시간이 된다.

딱딱하고 등받이가 없어도 길상사에는 엉덩이 내려놓듯 마음도 놓고 앉아 쉬어갈 의자들이 많아서 좋다.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아침 일찍 새소리를 벗 삼아 잠시 앉아 쉬었다가 돌아왔다.

살면서 들여다보면 길 옆에 앉아 쉬어갈 수 있는 의자들은 세상 여기저기 놓여있다. 앞만 보고 걷거나 괜히 바쁜 척하면 보이지 않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어떨 때는 원하지 않아도 앉아 쉬어가야 할 시간도 생긴다. 앉을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다.  

먼 길을 걷는 이에게 잠시 앉아 쉬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학창 시절 수업 시간이 끝나갈 무렵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간절히 기다리듯이, 삶의 순간순간 주어지는 쉬는 시간을 기쁘게 잘 챙겨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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