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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Jan 04. 2020

속 보이는, 속이는

맑고 깨끗한 자연을 지향한다며 35년 만에 병을 초록색에서 투명하게 교체한다는 사이다 광고를 보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며칠 후 소주병도 그렇게 투명한 색으로 바뀐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동안 멀쩡히 지내던 초록병에 갑자기 왜들 이러나 했더니 페트병 관련 규제가 바뀌어서 그렇다고 했다. 자원 재활용법이 개정되어 초록병처럼 재활용이 어려운 포장재에는 환경부담금이 부과된단. 업체들은 자진하여 환경을 생각하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알고 보면 다들 등 떠밀려 포장을 바꾸는 모양새였다.

초록색에 익숙해있어서 투명한 병이 조금 낯설긴 했지만 본래 색을 그대로 보여준다니 잘 되었지 싶었다. 맥주 같이 품질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닌 바에야 굳이 초록색 병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본래 색이 맑다면 숨길 것 없는 투명한 병이 더 잘 어울린다. 겉과 속이 같도록, 겉을 보면 속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람직하다. 

요즘 거리는 전보다 밝아지며 화려해졌다. 1층의 카페나 음식점 외부가 대부분 통유리로 바뀌어서 안에서 먹고 마시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냥 들여다보인다. 안에 들어서면 음식이나 음료를 만드는 공간도 개방되어 있다. 옛날 다방은 보통 문을 고 들어가기 전에는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낮은 탁자와 커다란 어항, 구석에 작은 텔레비전 등 안 봐도 뻔한 풍경이 감춰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어두운 극장에서야 연인들이 손을 잡는, 혹시 장난 전화를 받거나 아이들이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도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기술이 발달하며 우리 생활에서 비밀의 영역은 지워지고 있다. 하루 종일 온갖 기기에 존재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며 지낸다. 자발적으로 사진을 SNS에 담아 올리며 생활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개인 정보도 털려 떠돌고 있다는 사실은 피싱 전화를 한두 번 받아보면 알게 된다. 투명해지는 세상에서 이제는 흔적 없이 무슨 일을 벌이기는 어려워졌다. 요즘은 초인종 누르고 도망치는 '벨튀' 장난은 민속촌의 '이놈 아저씨'에게나 통하는 추억이 되었다.

사진 : 한국민속촌 페이스북

투명함은 도로 위 질서를 공평히 관리한다. 교통 단속 카메라는 차에 타고 있는 이의 성별이나 나이, 빈부에 관계없이 무심히 작동한다. 수억 대 외제차라고 해서 황금색이거나 궁서체 번호판을 달지 못한다. 운전자신호를 지켜 양보하고 멈춰 기다리는 것은 대부분 번호판의 역할이다. 투명한 제도가 질서를 유지하며 약자를 보호한다.  

다른 이에게서 '속 보인다'라는 말을 들을 때의 느낌은 '솔직하다' 할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누구에게 있는 욕망을 섣부르게 드러냈을 때 '속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법적으로는 솔직하게 다 드러내지 않는다면 속이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지만, 주위 사람들과 편하게 지내려면 속을 보이는 것보다는 적당히 세련되게 잘 속이며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정정당당하다는 스포츠도 결국 속이는 기술이 승부를 가른다. 투수는 타자의 습성을 파악하여 변화구로 속이고, 배구의 시간차 공격은 수비수를 속여 허점을 찌른다. 축구 공격수는 수비수를 속여 제치며 돌진한다. 온갖 페인트 동작이 난무하는 스포츠에서 어리버리 속내를 드러내면 진다.


매일 접하는 광고야말로 소비자를 세련되게 속이는 기술의 집약체이고, 솔직함보다 썸이나 화려한 이벤트가 연인 사이 더 먹히는 경우를 본다. 속 보이는 것과 속이는 것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간격은 너무나 크다.   

투명함은 단순함과 흔히 혼동되기도 한다. 복잡하면 뭔가 불투명하고 감춰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학이나 물리학은 복잡한 수식과 이론을 통해 자연현상과 우주 탄생의 이치를 명확하고 투명하게 해석해낸다. 사람의 속내는 우주만큼이나 복잡한데, 단순하게 생각하고 다가서서 처방을 내리면 풀리지 않고 결국 속을 썩이는 일이 생긴다. 스스로나 상대방이나 서로 잘 가꾸어갈 필요가 있다. 속이지 않으며 속 보이게. 투명하되 투박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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