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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Feb 23. 2020

감추니까 부끄럽지

인스타그램에 ‘여행에 미치다’라는 사이트가 있다. 백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가진, 관리자에 선별된 그림 같은  여행 사진이 계속 업데이트되는 곳이다. 그곳에 '베트남에서 소매치기 두 번이나 당한 썰'이라는 영상이 올라왔다. 삼각대를 놓고 여자 세 명이 동영상을 찍던 중 가방을 도난당해 당황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기막힌 일은 계속되었다. 분실한 여권 재발급을 위해 버스를 몇 시간 타고 내려 영사관에 가는데 오토바이가 핸드폰을 낚아채갔단다. 그들에게는 정말 다시 떠올리기 싫은 경험일 텐데도 해외에서 경찰서 신고나 임시 여권 재발급, 도난을 피하는 주의사항 등을 차분히 글에 당부해놓았다. 다른 이를 위해 시간을 내어가면서 부끄러운 일을 드러내어 공유하는 마음씨가 고마웠다.

사진 : 인스타그램 [여행에 미치다]

어떤 일은 부끄러워 감추는 것이 아니라 감추니까 부끄러운 일이 된다. 드러내는 일 그래서 자신이 그것으로 인해 더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러면 좀 어때.' 스스로 인정하며 마음에서 털어내는 일이다. 실수나 약점을 드러내는 일은 누구든 꺼리는 일이라서, 용기 내어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존경의 마음이 생긴다.


소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은 더 힘겹다. 수술로 여성이 된 후 여군이나 여대생으로서 새 삶을 찾고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었던 이들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응원했지만, 통념의 단단한 벽을 견디지 못한 그들은 포기를 선택했다. 이들을 넉넉히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가 안타까웠다.  

예전에는 '굳은살'이라는 표현이 좋았다. 드러내고 상처받고 아물고 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점점 굳은살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아프게 않게 되는 것. 덜 아프기 위해 드러내는 단련의 과정이 성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생각이 달라진다. 굳은살을 얻기 위해 견디는 지극히 개인적 인내의 과정, 그래서 얻게 되는 무뎌진 감각이라는 극복의 결과에 마음이 거북해진다.


드러내는 일은 상처의 치유 과정이 되어야한다. 따끔따끔해서 '아야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호오' 하고 불어주는 따뜻한 숨결은 상처가 아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치유의 경험이 자주 나타나야 하는데, 마음에 굳은살이 있으면 다른 이의 아픔에 무심해진다. 그것도 못 견디냐 참으라 하거나 나는 말이야하며 오히려 자기가 상처를 주는지도 모른다. 굳은살을 조금 덜어내면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더 알게 되고, 그만큼 다른 이를 더 이해하고 관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사진 : 인스타그램 [여행에 미치다]

인스타그램 '베트남 소매치기 썰'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6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우리는 다행이네, 베트남 무섭네, 조심하세, 헐. 하는 글이었다. 나는 그곳에 공유해줘서 고맙다는 댓글을 달았다. 글을 본 이들은 여행지에서 좀 더 조심할 것이고 그들 중 몇 명은 용기있게 드러낸 이들 덕분에 여행을 망칠 뻔한 일을 피할 것이다.


설 연휴에 세부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몇 가지 액티비티 중 하나가 캐녀닝이었다. 계곡을 따라 깊은 물에 뛰어들거나 바위를 타고 걸어 내려가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매끈한 바위 같아 보여도 가까이 다가가면 움푹 들어간 홈이 있었고, 조금씩 시멘트가 발라있어서 편히 지나갈 수 있었다.

어떨 때 보면 자기 인생은 울퉁불퉁인데 다른 이들은 매끄럽게 사는 것 같다. 근데 드러내놓고 보면 다들 마찬가지다. 삶은 곳곳이 파여있고 움푹 들어간 곳 투성이라는 사실, 그래서 서로 그만큼 더 잘 딛고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 드러내기 전에는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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