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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r 23. 2020

햇볕의 밀도

영화 '밀양'(2007)

밀양의 땅에 햇볕은 공평히 내리쬐나요? 땅의 굴곡이나 방향에 따라 햇볕의 밀도가 다르지 않나요? 내 이름은 신애. 믿을 신, 사랑 애. 당신을 섬기는데 적합한 이름이네요. 밀양은 남편의 고향이에요. 그가 죽고 나서 서울이 싫어질 때, 이곳이 떠올랐어요. 남편이 내려가서 살고 싶다고 했던 곳, 비밀 밀, 햇볕 양. 그 이름 같은 햇볕을 기대하며 밀양에 왔어요. 아들 준이와 단둘이서.


당신의 사랑은 햇볕처럼 공평한가요?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그놈의 기도에 응답하고 쉽게 용서했나요?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간절한 사람이에요. 간절히 바라는 것 앞에서는 정신없이 약해져서 무엇이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내 아들 준이가 사라졌을 때, 내가 바보처럼 그놈이 하라는 그대로 할 수밖에 없던 것처럼.

준이만 돌아온다면, 나와 숨바꼭질을 하고 놀던, 죽은 제 아빠가 그리워 코 고는 흉내를 내던 가엾은 준이. 그 목소리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내가 그놈 전화에 마음이 무너져 이리저리 끌려 다닐 때, 당신은 어디 있었나요? 밀양에 처음 도착한 날 시냇가에서 내리쬐던 햇볕. 그 햇볕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었나요? 준이가 그놈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때, 그때도요?


생각해보면 당신도 마찬가지였어요. 나를 한없이 간절하게 만들었어요. 내 남편 준이 아빠. 그의 사랑을 빼앗아가고 결국 그를 데려갔어요. 그리고 준이 마저도. 준이를 잃기 전까지는 고통은 견딜 만하고 불행 택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고통도 불행도 다 당신 뜻이라고요? 그래요. 당신이 이겼어요. 가슴이 눌려 꺽꺽대는 고통이 너무 심했고, 불행에 목 놓아 울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어요.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는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기도회장으로 끌리듯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타인의 고통을 참 쉽게 말하는 밀양 사람들. 그들과 지내면서,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요. 내 고통과 불행이 그들 마음에 평화의 수단이라는 것도. 이제 그들도 알아야 해요. 당신은 사람들이 섬기도록 하는 것에만 관심 있는, 정의롭지 않은 위선적 존재라는 사실을.


당신은 보고 있었나요? 억새 밭에서 장로가 나에게 한 짓을, 야외 기도회에서 당신의 거짓이 드러나는 모습을. 그래요. 나는 당신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칼로 손목을 그었어요. 그게 당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복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 난 다시 살고 싶어 뛰쳐나갔어요. 난 지지 않아요. 당신과의 싸움은 이제 장기전이예요.


당신은 내가 퇴원하는 날에도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놈 딸을 내 앞에 보냈지요. 당신이 감옥에 있는 그놈 목소리를 내게 전화로 들려주었던 것처럼. 나는 준이처럼 힘없이 당하지 않아요. 나는 그곳을 뛰쳐나와 햇볕 내리쬐는 마당에서, 그놈 딸이 자르다 만 머리를 혼자 자르기 시작했어요. 그때 누군가 와서 거울을 들어 나를 비춰주었지요.

밀양에 오던 날처음으로 만나 항상 내 곁을 지켜준 사내. 내가 거울을 보는 동안 그는 나를 바라보았어요. 당신의 서늘한 햇볕은 그의 미소로 인해 따뜻해졌어요. 나는 가위로 햇볕을 자르듯, 고통과 불행을 자르듯 천천히 머리를 잘라 떨어뜨렸어요. 마당에 내리쬐는 햇볕의 밀도가 참 짙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밀양인가 봐요. 빽빽할 밀, 햇볕 양.


사진 출전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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