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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Apr 30. 2020

발아를 바라보며

마트에 화분을 사러 갔다가 씨앗 코너 한편에 꽃씨들 사이 꽂혀있는 무순 씨앗이 눈에 띄었다. 월남쌈이나 김초밥에서  수 없는 알싸한 존재감, 무의 새싹. 15그램 봉지 하나에 천오백 원밖에 하지 않아 부담 없이 사 왔다. 집에 와서 뜯어보니 씨앗이  많이 들어있다. 

재배법은 간단했다. 씨앗을 조금 덜어내어 대여섯 시간 물에 불린 후 키친타월을 적셔 깔고 접시에 올렸다. 싹이 트려면 따뜻한 곳에서 햇빛을 가려줘야 한다고 하여 상자를 덮어두었다. 다음 들춰보니 새싹이 나왔다. 솜털 같은 하얀 뿌리를  작은 싹들 저마다 머리를  있었다. 씨앗은 껍질 속에  싹을 미리 담아 준비하고 있었다.

식물의 발아 과정에는 보통 수분과 적당한 온도와 어둠, 산소가 필요하다. 씨앗은 수분으로 껍질을 불려 호흡을 준비하며, 어둠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떡잎을 펼친다. 그러는 동안 산소는 씨앗의 대사를 일으켜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래서, 씨앗이 계속 물에 잠겨 있으면 산소가 모자라 발아가 제대로 안 된다. 가지고 태어난 양분이 소진되면, 작은 잎은  잎만 한 햇빛을 챙겨 광합성을 시작한다.

발아 과정에는 물과 어둠이 있었다. 물에 잠김으로써 말라 있던 씨앗잠을 깨어 활동을 시작했고 어둠 속에서 잎과 뿌리를 틔워냈다. 생각해보면 아기가 태어나는 습도 이와 같았다. 물에 잠긴 어둠의 시간이 성장을 이끌었다. 성장이 진행되면 씨앗과 아기를 보호했던 껍질과 자궁이 점점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식물은 껍질을 깨며 발아를 시작하고, 아기는 양수를 터뜨리며 엄마 몸 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새로운 성장이 시작된다.

누구나 마음속에 씨앗이 있다. 다만 싹 틔울 환경이 성숙하지 않았을 뿐이다. 씨앗이 싹을 틔우려면 한참 동안 물에 잠기고 어둠 속에서 답답함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껍질을 충분히 부풀려야 새싹의 힘으로 어둠 속에서 뚫어낼 수 있다.


문득 스스로 물에 잠겨있는 사방이 축축하고 먹먹하게 느껴지거나, 주변이 깜깜하여 도무지 뭐가 뭔지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답답하게 느껴질 때는 마음속 씨앗에서 발아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 마른 씨앗이 수분을 만나 어둠 속에서 껍질을 뚫어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답답함은 발아를 이끄는 큰 힘이 된다. 그러니 잠시 꼼지락대면서라도 묵묵히 마음을 다스려 견디는 편이 좋다.   

그러다 도저히 답답함을 견딜 수 없다면, 먹먹하고 깜깜함을 결코 참을 수 없다면, 내 안의 씨앗이 힘껏 발아하도록 소원을 담아 한번 소리 높여 외쳐볼 필요는 있다. 한번 '씨' 에다가 '발아'를 붙여 크게 외쳐 보자. 아기가 첫울음을 터뜨리듯 세상에 한번 크게 소리쳐 보자.


이제 껍질이 부서지며 뿌리가 뻗치고 산소가 확 들어오기 시작했다. 햇빛이 떡잎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제 광합성으로 쑥쑥 자랄 일만 남았다. 새싹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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