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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Feb 06. 2022

여의도의 여백

여의도에 특이한 건물이 있다. 백화점이 아닌데 사람들이 백화점이라고 부르는 건물. 엄연히 빌딩 이름이 따로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냥 백화점이라고 부른다. 나는 누군가 그곳을 지금 이름인 맨하탄 빌딩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다들 여의도 백화점, 그보다는 줄여서 그냥 '여백'이라고 부른다. 여백 앞에서 보자고 하거나 여백 지하에 있는 식당이라고 얘기하거나...


지금은 많이 낡았지만 1983년 신축 때는 그 당시 몇 개 없던 백화점으로 개장했다. 영업 부진으로 문 닫은 후에 창문도 새로 만들고 내부 공간을 나누어 오피스 빌딩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백화점이라고 불렀나 보다. 이제 아예 건물 전면에 '구) 여의도 백화점'이라고 커다랗게 간판을 달아놓았다.


'구'라는 접두사는 지금은 '구남친'이나 '구정' 같은 단어에나 붙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그냥 백화점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다. 일반 오피스 빌딩과 다르게 1층이 로비 대신 사무용품이나 약국, 시계방, 꽃집, 서점 같은 잡화 매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7층에 있는 식당가 음식점들이 백화점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많은 이유로 무엇의 호칭이 바뀌기도 하고, 같은 것이 다른 이름들로 불리기도 한다. 얼마 전에 회사에 경력증명서를 내야 할 일이 있었다. 인사부에서는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를 떼면 '구'직장이 다 나와있어 경력증명서 대신 쓸 수 있다 했다. 떼고 나서 살펴보니 내가 다니지 않은 회사 이름이 목록에 있어서 이상하다 하며 근무연도를 맞춰보았다. 아, 회사가 합병되고 다시 인수되어 지금의 회사가 되어있었다. 회사명에는 예전 명칭을 굳이 '구'라고 해서 달지 않으니 옛 이름은 시간에 묻히고 다녔던 이들의 기억 속에나 남아있다.


가끔 '구'직장 사람들을 만나면 보통 그때 불렀던 호칭을 그대로 부른다. 누구 대리님, 누구 선배, 누구 씨... 호칭에는 그 시절 추억이 담긴다. 요즘 모이는 독서나 글쓰기 모임에서는 각자 별명을 정하거나 이름 뒤에 '님'자를 붙여 부르는데, 불리는 호칭에 따라 나는 조금씩 다른 내가 된다. 김 부장, 라이언, 병수 님, 그래도 님, 병수 씨...  부르는 호칭이 다양해질수록 삶은 조금씩 풍부해지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호칭마다 고유한 추억이 담기겠다. 부모님을 엄마 아빠로 부르거나 아내의 이름 뒤에 '씨'를 붙여 불렀던 시절 추억처럼.   


여의도 중심의 그 낡은 흰 건물에게는 맨하탄 빌딩 아니라 백화점으로 불리는 기분이 어떠려나 생각했다. '맨하탄' 아니라 '맨해튼' 정도 발음으로 불러줘야 그래도 좀 나으려나 하면서도 작년에야 제대로 백화점이 들어선 여의도에서 백화점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나쁘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참, 여백 지하에 유명한 콩국수집이 있다. 한 그릇 대접할테니 여백에서 추억을 만드실 분은 연락하면 먼저 가서 줄 서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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