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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23. 2020

티 좀 내지 마

양재동 꽃시장에서 손바닥만 한 나무를 발견했다. 빨대만큼 가는 줄기에 윤기 있는 잎을 가진 작은 나무. 커피나무라고 했다. "키우면 정말 커피가 열려요?" 혹시 잎에서 커피 향이라도 나는지 맡아보며 물었다. "한 5년 잘 키우시면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려요." 주인의 말투에서 '네가 과연 잘 키울 수 있을까?'라는 느낌이 묻어났다. 하긴 나도 지구 저편 고향에서 반대편으로 건너온 이 식물을 잘 키워낼 자신은 없었다.

화분에 옮겨 심어 놓고 보니 커피나무 키우기는 생각보다 쉬웠다. 커피나무는 마치 말 잘 듣는 아기와 같았다. 물 주는 때를 넘기면 잎을 축 늘어뜨리며 풀이 죽었다가도 '어이쿠 얘가 왜 이래.' 하며 물을 주면 금방 다시 잎을 반짝 들어 올리며 생기를 찾았다. 배고파 울던 아기가 엄마 젖을 먹고 나서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식물은 그와 달리 보통 과묵한 편이다. 혹시 흙이 마르지 않았는지 잘 살펴 물을 주지 않으면 조용히 잎이 마르며 시들어간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손을 써도 이미 내상을 입은 경우가 많았다.

세상 어리거나 약한 것은 필요에 따라 스스로 티를 내어 돌봄을 구하는 게 생존의 원리다. 꽃 피고 벌레 우는 것처럼 자연은 제각기 나름의 티를 내며 열매를 맺거나 번식하며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불공평한 인간 세상의 질서는 약자가 티 내는 것을 좀처럼 권장하지 않는다. 티 좀 내지 말라고, 왜 징징대고 떼를 쓰냐며 핀잔을 놓기 십상이다.


돌봄이 필요한 약자일수록 보통 업신여김을 받는다. '없이 여기다'라는 어원처럼, 조용히 할 일이나 하면서 티 내지 말라한다. 그러한 질서 속에서 반복되는 재해나 사고의 피해는 주로 약자의 몫이 된다.   일이 벌어질 때만 잠깐 티가 날 뿐이다.


약하고 힘든 이가 티를 낼 때 적절한 처방을 모색하는 사회는 건강하다. 어린 커피나무가 목마른 티를 낼 때, 물만 잘 챙겨주면 기력을 차리고 건강하게 자란다. 사회도, 사람 사이 관계도 그렇다.


고1 아들을 사고로 잃은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손자를 무척 아꼈던 부친에게 그 사실을 감추었다. 고혈압이 있어 위험하다 생각했다. 명절에 만날 때마다, 손자가 외국에 유학 가서 잘 지내고 있다고 둘러댔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부친에게 울면서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고 부친이 대답했다. 사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네 마음에 짐이 될까 싶어 나도 모르는 척하느라 그동안 힘들었다고.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같이 울었다. 정혜신의 책 '당신이 옳다'에 소개된 일화이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몫으로 견딜 만큼의 슬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아픔이 있을 때에 가능한 한 티를 내어 공감으로 치유해야 슬픔으로 증폭되지 않는다. 아픔은 가늠할 수도 비교할 수도 없기에 그냥 우선 공감으로 끌어는 것이 약이 된. 그러니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을 전하는 게 좋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초코파이가 달콤하다는 정도밖에는 없다. 누구를 사랑한다면 고백의 말로 좋아하는 티를 한껏 내야 나중에 후회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커피나무를 5년쯤 잘 키워서 꽃이 피고 검붉은 열매가 여는 모습을 그려본다. 지금과 같이 티 내고 챙겨주며 잘 자라면 좋겠다. 열매가 열리면 따서 말리고 잘 볶아 향기로운 커피를 내려야겠다. 좋은 잔에 담아 우아한 티를 마음껏 내며, 진한 향기를 당신과 함께 나눈다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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