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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Jul 08. 2020

회자정리의 방법

몸이 좋지 않으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어수선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꽂이 앞이나 책상 위, 서랍이나 상자를 가득 채우거나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들.


아플  혼잡스러운 사물이 유난히 거슬려 보이는 것은 몸의 유전자가 무의식 중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주변을 깨끗하게 하여 몸이 아픈 원인을 제거하라거나, 또는  악화되어 혹시 죽을 수도 있으니 위를 정리해 놓으라거나... 어쨌든 갑자기 몸이 무겁고 머리가 띵한 휴일 아침, 눈에 띄게 거슬리는 책장 주변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딘가를 정리할 때,  상태 그대 버릴 것만 골라내어서는 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일단 모두 끌어내리거나 뒤집어놓고 시작한다. 모두 버릴 거라고 가정하고 바닥에 펼쳐놓은  하나씩 살펴 구제하다 보면, 선택과 갈등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동안 멀쩡하게 자리 잡고 있던 사물들이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 눈빛을 하고 빤히 나를 바라본다. '설마 저를 버리실 건가요?' 나는 단호해야 한다. "회자정리!". 그들에정리의 대상임을 선포한다.

'Shrek2', Dreamworks

정리 기준은 크게 두 가지다. 쓰임새와 추억. 두 기준에 따른 효용의 넓은 스펙트럼 사이에서, 쓸모를 다하고 추억이 바랜 사물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직 쓸모 있는 물건은 버릴 이유도 없으니, 단지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것들만 한 곳에 잘 모아 정돈하면 된다. 다만 이제 쓸모는 없으나 나름 추억이 담긴 사물들 앞에서 나는 주저한다.


정리는 사물뭉뚱그려진 시간하나씩 펼쳐보고 간추리는 작업이다. 사물에 담긴, 학생 시절, 사회 초년 시절, 이전 회사 시절 등들추면, 담겨있던 그 순간이 튀어나와 숨을 후우 내쉰다. 결국에는 그 숨결에 취해 별로 버리지도 못한 채, 간추리고 닦는 것으로 정리를 마치게 된다. 슈렉의 고양이들은 깨끗해진 보금자리에서 안심하고 다시 잠이 든다.


세월은 많은 기억뭉뚱그린다. 많은 고유 명사를 점점 보통 명사로 바꾸어 간다.  세월을 견디는 사물들, 가끔 꺼내어 닦아주면 마음이 몽글해지고 추억은 촘촘해지며 사물은 다시 고유한 기억으로 빛난다. 해인사에 선조들이 수백 년 잘 보관해놓은 팔만대장경도 가끔씩 먼지 털고 닦아주고 햇빛도 보게 한다. 우리가 보기엔 팔만여 개나 되는 경판 중의 하나이지만, 하나하나 경판에 쓰여있는 부처님 말씀은 각각 다르고 소중하다.

팔만대장경 정대불사, 법보신문 2020

책장 주변 정리를 마치고 보니 몸이 많이 좋아졌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몸에도 괜찮은 거구나 생각했다. 사물을 정리하다 보니 기분도 같이 정리된 느낌이다. 그런데, 한 곳을 치우고 닦아놓으니 이제 정리한 곳과 비교되어 지저분한 다른 곳이 자꾸 눈에 띈다. 이러다가 온 집안을 다 치우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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