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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Aug 02. 2020

돌이킬 수 없는 일

'아들이 타투를 했다.'는 제목의 글을 보았다. 아버지는 예고 없이 발목과 정강이에 타투를 고 나타난 대학생 아들이 낯설었다. 이미 벌어진 상황이라서 강하게 질책할 수도, 그렇다고 쿨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타투' 대신 '문신'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 글에서 아버지의 착잡한 심경묻어났다. 글에 달린 많은 댓글 중에서 '아들에게 지울 수 있는 타투를 권유하면 어떠냐'는 내용이 있었는데, 글쓴이는 '아들이 타투는 지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행동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답글을 달았다. 아들에 대한 응원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아버지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다.


한국에서 타투 또는 문신은 <사람들이 그리 좋게 보지 않는 데다, 한번 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인식 아래에 있다. 아직 시술 행위마저도  테두리 바깥에 있어 더욱 세대 간 생각 차이가 커 보인다. 타투를 반영구적 치장과 자기표현 수단 중 하나로 여기는 젊은 세대와, 타투에서 조폭이나 유흥업소, 아웃사이더를 연상하는 기성세대의 거리는, '선타투 후뚜맞(우선 타투하고 나중에 들키면 뚜드려 맞자)'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세 들어 살면 벽에 못 하나 박기도 부담스럽지만 자기 집이라면 그렇지 않은 것처럼, 타투를 하는 일은 몸이 이제는 자기 것임을 선언하고 꾸미는 일이다. 평생 가져갈 도안에 추억과 좌우명을 담아서 타투를 새긴다. 시술 방법은 종류나 부위에 따라 다양하나 지우는 법은 같다. 병원에서 수 차례의 레이저로 지우는데, 그 과정의 고통, 시간과 비용은 새길 때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타투는 결혼과 비슷하다. 배우자를 고르는 순간에는 심사숙고하여 살펴본 후, 그를 평생 함께할 사람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길게 뻗어갈수록 두 직선의 작은 각도 차이가 거리를 벌리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자 생각과 취향은 변하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부분, 이를테면 아이를 키우는 방식, 역경을 받아들이는 태도, 편안함을 느끼는 시간과 장소 같은 것이 중요해지며 상대에 대한 평가 기준이 전과 달라진다. 신중히 새긴 타투라도 시간이 지나면 (꼭 사귀던 연인의 이름을 새긴 정도가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지우는 것은 결혼도, 타투도 쉽지 않다. 많이 아프고, 깨끗이 지우지도 못한다.  

요즘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혹한 세상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마음껏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는데,  제 몸 하나 마음대로 꾸미고 싶다는 뜻깊은 청춘의 욕망에 대해 혀를 차며 신체발부 어쩌고 하는 훈계를 보낸다. 그러는 그들은 라떼 시절 유행했던 사랑마저 연필로 쓰라는 노래대로 살아서 지금껏 지우개로 쓱쓱 지워가며 행복하게 잘들 지내시는지 묻고 싶다.  

   

저지름이 충만하여 젊음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해서 안 되는 일이기보다 잘 생각해서 하면 되는 일이다. 결혼도 타투도 해도 되고 안 해도 좋지만, 그를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괜찮다. 그러나, 언젠가는 타투나 배우자가 낯설게 보일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오더라도, 예전 새겼을 때의 마음을 미소로 떠올리며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면 좋겠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기보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것에 더 애정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들이 부디 스스로 세상에서 멋진 타투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좋은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길, 세상이 뭐라고 하더라도 지워지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갖추며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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